제11화 우리는 왜 여전히 외국인을 두려워하는가 수십 번 들었다. "외국인 때문에 우리 동네가 무너졌어요." "요즘은 동네가 너무 시끄러워요." "그 사람들끼리만 뭉쳐서 무서워요." 이런 말들 속에는 숫자가 없다. 자료도, 통계도 없다. 그러나 그 말에는 무거운 감정이 있다. 불쾌함, 두려움, 불안, 그리고 설명할 수 없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는 감정의 결들이 층층이 쌓여 있다. 정책은 이 감정을 다루지 않는다. 정책은 언제나 팩트만을 말한다. "이주민 범죄율은 내국인보다 낮습니다." "지역경제에 기여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증가했습니다." "다문화 가정 학생 수가 몇 퍼센트입니다." 그러나 이 차가운 수치들은 뜨거운 감정을 설득하지 못한다. 감정은 논리를 뚫고 나가고, 서사는 통계를 무력화시킨다. 우리는 지금 '두려움의 공동체' 속에 살고 있다. 외국인만이 아니라, 낯선 것, 다른 것, 바뀐 것에 대한 전방위적 공포가 마을을 감싸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외국인 혐오가 아니다. 이는 우리 공동체가 변화에 직면했을 때 감정을 처리하지 못하는 근본적 구조의 반영이다. 경북의 작은 읍에서 한 어르신의 말을 들었다. "그 사람들은 친절한데, 왜인지 불안해요." 나는 그
제10화 '정주'라는 단어는 누구의 것이었는가 정주(定住). 한자로는 '머무를 정, 살 주'. 사전적 의미로는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삶을 이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단순한 두 글자가 오늘의 대한민국에서는 얼마나 공허한 행정용어로 전락했는가. '정주 지원사업', '정주 인프라 확충', '정주 환경 개선'... 관청의 문서들은 정주라는 글자로 넘쳐나지만, 그 안에는 단 한 명의 살아 숨쉬는 인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묻고 싶다. "정주는 본래 누구의 것이었는가?" 이 말을 떠올릴 때, 우리는 과연 그 땅에서 자라고 있는 사람의 기척을 느끼는가? 아니면 그저 '주택 보급률', '교육 인프라 지수', '근린생활시설 수'라는 차가운 숫자들을 떠올리는가? 전자의 정주는 사람의 것이고, 후자의 정주는 문서의 것이다. 둘 사이의 간극은 하늘과 땅만큼 넓다. 이주자들에게 정주는 결코 행정 절차가 아니다. 그것은 기억의 축적이다. 어느 가을날, 처음으로 한국 마트에서 고향의 향신료 고수를 발견했을 때의 그 놀라움.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처음 받아 온 크레파스 상자를 들고 뛰어들어오던 날의 기쁨. 좁은 컨테이너 집 앞마당에 작은 화분을 놓고 고향의 씨앗을 심었던 어느 봄날
제9화 정책은 여전히 혼자다 영천에서 들은 이야기다. 고려인동포가 가족을 데려왔다. 지역특화형 비자(F-4-R)로 합법적으로 일하는 그는 희망에 찼다. 그러나 그의 부인이 받은 것은 F-1, '동반비자'였다. 취업은 불가능하고, 단순노무조차 '체류자격 외 활동 허가'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이민정책이다. 배우자는 데려올 수 있으나, 그 배우자는 일해서는 안 된다. 이는 가족을 데려오라는 말이 아니라, '보호자 없는 체류'를 법적으로 강요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 외국인 배우자는 사람이 아니라 '부속품'이다. 노동할 권리도, 독립적 존재로 인정받을 권리도 없다. 마치 청나라 시대 족외인(族外人)처럼, 그저 '붙어 있는 타인'일 뿐이다. 자녀는 또 어떠한가? 학교에 들어갈 권리는 있으나, 행정서류에는 늘 '부모 외국인번호 없음'이란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건강보험은 취득 제한이 많고, 아프면 병원비가 몇 배로 불어난다. 합법적으로 왔으나, 그들은 정책의 빈칸 속에 존재한다. 그 빈칸은 언제든 "떠나라"는 냉혹한 글자로 채워질 수 있다. 비자가 공동체를 만드는 제도라면, 그 공동체는 가족 단위여야 한다. 정책이 혼자 온 사람만을 상정하는 순간, 그
제8화 우리는 누구를 기반으로 했는가 사람들이 말한다. "이주민 통합정책이 필요하다." "다문화 사회에 대비해야 한다." "이주민 아이들에게 한국어 교육을 강화하자." 그 말들 속에는 의도가 있다. 그러나 그 의도는, 누가 누구를 기준으로 삼는가?라는 질문을 회피하고 있다. 나는 수년간 그 정책자료들을 읽었다. 통합정책, 다문화가족지원법, 외국인정책 기본계획... 수백 페이지의 정책 안에는 빠지지 않는 단어들이 있다. '정착', '교육', '사회 적응', '문화 차이', 그리고 '갈등 예방'. 이 모든 단어의 주어는 '그들'이다. 그들이 정착해야 하고, 그들이 배워야 하고, 그들이 적응해야 하고, 그들이 갈등을 일으킬 수 있으니 관리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이제 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그들'이 항상 '적응의 대상'인가? 왜 '우리'는 늘 '기준'이고, '그들'은 '조정 대상'인가? 이것이 이주민 통합 담론이 가진, 가장 무서운 위선이다. '우리는 변하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이 그 안에 들어 있다. 나는 경북 영천에서 만난 한 고려인 여성의 말을 기억한다. "한국에 왔지만, 내 가족은 여전히 구경거리입니다." 그녀는 자녀의 급식에서 '김치가
제7화 지역은 비자를 발급할 수 있는가? 그날 회의에서 누군가 물었다. "지방정부가 무슨 권한으로 비자를 발급합니까?" 그는 그걸 말도 안 되는 상상처럼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듣고 오히려 확신했다. 이 질문 자체가 지금 우리가 살아 있는 증거다. 왜냐하면, 지금껏 지역은 정책의 소비자였다. 중앙이 만든 비자를 받아서, 중앙이 보낸 사람을 받아서, 중앙이 정한 방식으로만 외국인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나는 반문한다. 왜 지방이 '사람을 선택할 권리'를 갖지 못하는가? 지역은 스스로 계획을 세운다. 도시를 만들고, 예산을 짜고, 외국인을 유치하기 위한 사업도 한다. 그런데 정작 사람을 받아들이는 권한은 없다. 이것이 지방자치의 가장 절박한 결핍이다. 사실 대한민국은 모든 권한이 중앙에 집중된 비자 중앙집권국가다. 그 어떤 지방정부도, 그 어떤 특구도, 사람 한 명의 입국이나 체류에 직접 영향을 줄 수 없다. 그렇기에 지금 광역비자는 단지 새로운 비자체계가 아니라, 헌법 구조에 도전하는 자치실험이다. 나는 이 지점에서 캐나다의 PNP, 호주의 주정부 지명 이민, 일본의 지방 이민 실험을 떠올린다. 이들 국가는 이미 지역이 사람을 선택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제6화 특별법이 필요한 이유 나는 이 말이 늘 꺼림칙했다. "광역비자요? 법무부 훈령으로 가능해요." 한 고위 공무원이 말했다. 그는 친절했고, 유능했으며, 계산이 빠른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에서, 이 사회가 공동체를 다루는 방식의 한계를 보았다. 훈령은 행정부가 만드는 내부규정이다. 절차는 간단하고 속도는 빠르다. 그러나 훈령에는 공동체의 합의가 없다. 그것은 정치 없이 만들어진 행정의 언어다. 나는 지방의 문제를 훈령으로 다룰 수 없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지방은 사람의 문제이고, 사람은 제도 이전에 존엄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광역비자 특별법'을 말한다. 이 비자는 단순한 체류 자격이 아니라, 공동체에 대한 국가의 공식적인 약속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는 10개가 넘는 외국인 관련 법이 있다. 하지만 그 어느 법도 "이주민이 이 땅에서 정착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일할 수 있고, 공부할 수 있고, 머무를 수 있지만 '살 수는 없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의 법체계는 외국인을 체류자로만 본다. 정주자, 즉 함께 살아가는 사람으로는 보지 않는다. 우리는 그 빈 틈을 훈령으로 메우려 했다. 그러나 훈령은 언제든 바뀔 수
제5화 체류 말기에서 공동체가 시작된다 나는 지금도 그 장면을 잊을 수 없다. 경북의 한 농촌. 비닐하우스 옆의 임시 거처, 좁은 컨테이너 안에 아이 셋을 키우는 부부. 남편은 불법체류자였다. 아내는 비자 기한이 끝났고, 막내는 한국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 아이는 이 나라의 사람이 아니었다. 아이의 이름은 '김유진'이었다. 어머니가 한국 이름으로 지었다. 하지만 학교는 그 아이를 받아주지 않았다. 서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에겐 출생증명서가 없었고, 부모에겐 체류자격이 없었다. 나는 그날 한 가지를 똑똑히 깨달았다. "이 나라는, 종이 없으면 사람도 없다고 여긴다." 불법체류자. 이 단어는 너무 쉽게 말해진다. 그러나 이 말은 문법적으로 틀렸다. '체류'는 행위이고, '불법'은 규정이다. 그 둘을 붙이면, 사람 전체가 불법이 된다. 법은 사람을 규정해야 하지만, 이제는 사람이 법의 잉여가 되었다. 그는 살아 있고, 일하고 있고, 이웃과 인사를 나누지만, 그는 이 사회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묻고 싶다. "불법체류가 끝나는 지점은 어디인가?" 그가 자진출국하면 끝인가? 강제추방되면 끝인가? 아니다. 그가 이 땅에 삶을 남기고 간 이상, 그는 여전히 이 사
제4화 고향을 선택한 사람들 나는 한 외국인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우즈베키스탄에서 태어난 고려인이었다. 한국에 온 지 7년, 처음에는 경기도 화성의 자동차 부품공장에서 일했다. 그 뒤 경북 영천으로 내려왔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왜 수도권을 떠났습니까?" 그는 웃으며 말했다. "여기가, 살 만하더라고요." 그 짧은 문장은 내 사고를 흔들었다. 지방은 살 만한 곳인가? 아니, 우리에게 '살 만하다'는 기준은 무엇인가? 집값? 일자리? 학군? 교통? 우리는 너무 오래 이 기준들 속에 살며, 정작 '살다'라는 말이 어디서, 누구와, 어떤 관계로 사는가라는 더 근본적인 질문임을 잊었다. 그는 영천에 뿌리를 내렸다. 아내와 함께 왔다. 딸은 중학교에 다녔고, 아들은 한국어를 배웠다. 이웃은 처음엔 낯설어했지만, 두 해쯤 지나자 "그 집은 착하더라"는 말이 돌았다. 그러자 동네는 그 가족을 받아들였다. 그는 고향을 선택한 것이었다. 국가가 고향을 정해주지 않았고, 정치가 안내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자기 생애에서, 한 장소를 '살 집'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법은 그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체류 중'이었고, 아내는 '취업 불허'였
제3화 비자에도 계급이 있다 그날 나는, 같은 민족의 얼굴을 한 두 사람이 서로 다른 비자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접했다. 한 명은 F-4, 다른 한 명은 F-4-R. 표면상 둘 다 '재외동포 비자'라 불린다. 하지만 정작 그 둘 사이엔 삶의 자격을 가르는 보이지 않는 문지방이 놓여 있었다. F-4 비자는 재외동포에게 주어진다. 대한민국 밖에서 살았던 우리 핏줄. 하지만 이 비자는 단순노무직에는 들어갈 수 없다. 그들은 자격은 있지만, 손을 더럽혀선 안 된다. 말하자면, 일하되, 특정한 방식으로만 일하라는 비자다. 한편, F-4-R. 지역특화형 비자다. 국가는 일부 '인구감소지역'에게 이 특별한 권한을 부여했다. "해당 지역에 사는 외국국적동포에게, 단순노무 포함 모든 취업을 허락하겠다." 그러나 이 비자는 단서가 붙는다. "그 대신, 그 사람은 지역에만 있어야 한다." 그는 노동의 권리를 갖지만, 이동의 자유를 빼앗긴다. 나는 이 구조를 비자의 봉건제도라 부른다. 조선시대 양반이 말을 타고, 상민은 걸어서 가던 시대처럼. 지금 한국의 이주정책에도 사람을 나누는 계급의 언어가 존재한다. F-4는 능력의 이름으로, F-4-R은 지방의 구인난이라는 사유로,
제2화 머물기인가, 체류하기인가 그는 이곳에 있다. 일을 한다. 세금을 낸다. 아이를 낳는다. 그리고 살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이곳의 사람이 아니다. 이 나라의 법은 그를 그렇게 불러주지 않는다. 그는 체류자다. 머무는 자. 잠시 들른 자.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는 자. 국가가 그에게 부여한 이름이다. 나는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어떤 숨겨진 명령문을 본 듯했다. "너는 이 땅에 정들지 마라." "너는 이 공동체의 일부가 아니다." "너는 떠날 것이다." 한국은 수많은 외국인에게 거주의 사실은 허락하면서, 거주의 권리는 허락하지 않는다. 그 차이를 나는 20년간 연구하고, 현장에서 보았다. 그리고 그 차이는 언젠가 비극의 구조가 된다. 2024년 봄, 영천의 고려인 마을. 그곳은 이미 하나의 '이주공동체'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어머니들이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간다. 남편은 일터로, 아내는 시장으로 간다. 하루가 흐르고, 계절이 바뀐다. 하지만 이 공동체는 하나의 허구 위에 서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아내, 그들의 어머니, 즉 'F-1-9R 비자'를 가진 가족들은 '일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일자리가 안 돼요. 그래서 떠나요.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