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능력 새해가 오면 거리는 활기를 띱니다. 사람들의 눈빛은 희망으로 반짝이고, 발걸음은 새로운 꿈을 향해 분주히 움직입니다. 가슴속에는 변화에 대한 기대가 부풀어 오르지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한 달, 두 달, 달력의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변하지 않는 현실 앞에 무력감이 스며드는 듯합니다.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듯하지만, 같은 공간, 새로운 시간 속에서 우리는 다른 환경에 노출되어 살아갑니다. 어린 시절, 나는 이해할 수 없었지요. 어른들이 밤중에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하는 모습을요. ‘그냥 눈을 감으면 잠이 오는데, 왜 그렇게 어려워하실까?' 어리숙한 의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왜 이렇게 고민이 많아 보이실까? 왜 잘 드시지도 못하는 맥주를 드시고, 취하시고 괴로워 보이는 걸까? 그냥 마음 편하게 살면 안 되는 걸까?’ 어린 내 눈에, 아버지의 그런 모습은 나를 불안하고 초조하게 만들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되고서야, 그 답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놓인 환경을 이해하며 받아들여야 하는 과정들, 그것은 사랑하는 이들을 지키기 위한, 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내일을 향해 가는
다 안다고 생각하지 않기 – 익숙함이라는 이름의 착각에 대하여 사람은 참 쉽게 안다고 말한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몇 번의 행동을 지켜본 뒤 우리는 상대를 ‘이해했다’고 단정지어버린다. 더구나 그가 내 곁에 오래 머물렀던 사람이라면, 그 판단은 더욱 확고해진다. 가족, 친구, 연인, 동료. 긴 시간을 함께 보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상대의 마음을 더 이상 묻지 않게 된다. ‘쟤는 원래 그래.’ ‘그런 말 할 줄 알았어.’ ‘지금쯤이면 이런 기분일 거야.’ 그렇게 익숙함은 점점 판단이 되고, 그 판단은 결국 단정으로 굳어진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부터, 관계는 천천히 멀어지기 시작한다. 단정은 대화의 문을 닫는다. 관계를 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납작하게 만든다. 질문이 사라진 자리에는 오해가 쌓이고, 설명되지 않은 감정들은 마침내 침묵으로 굳는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고 믿었던 그 마음은 사실 다 알지 못했던 마음이었고, 알지 못했기 때문에 더 외로웠으며, 외로움은 결국 분노나 무관심이라는 방식으로 표출된다. 그렇게 가까웠던 사이일수록 더 깊은 오해와 거리감을 경험하게 되는 아이러니가 반복된다. 우리는 누구보다 잘 안다고 믿었던
허위과장 분양광고 피해를 방지하기 위하여 (2) 분양홍보관을 방문해본 사람이라면 한 번이라도 홍보관 내 설치된 건물 조형물에서 ‘분양마감’, ‘마감임박’ 이라는 플래카드를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광고에서는 ‘분양 마감 임박!’ ‘선착순 계약 중’ 등과 같이 시급성을 강조하는 문구를 추가하여 관심도를 높입니다. 통상적으로 사람들은 ‘분양마감’,‘마감임박’ 등의 홍보문구를 보고 실제 분양률이 몇 퍼센트일 것이라고 생각할까요? 실제 분양이 마감되었거나 혹은 마감 임박이니 ‘거의 다 팔렸구나’ 라고 생각할까요? 아니면 흔히 쓰이는 마케팅 문구이므로 실제 분양률과는 큰 차이가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할까요? 이 질문에는 복잡하고 다양한 법적 쟁점이 있지만 간단하게 몇 가지만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위와 같은 표현은 법적 규제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표시·광고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소비자를 속이거나 오인하게 만들 우려가 있는 광고는 허위·과장광고를 간주되어 공정거래위원회의 제재 대상이 됩니다. 문제는 입증의 어려움인데, 시행사 측에서는 내부적으로 마감 시점을 조율 중이라거나 판매 계획이 있었다거나 특정 평형대 기준이라는 등으로 해명
Barking up the wrong tree - 엉뚱한 사람을 탓한다. 잘못 짚는다. 살다 보면 종종 감정이 앞서서 상대방을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아무 말 없이 지나치는 동료를 두고 “날 무시하나?”라고 생각하거나, 아이에게 짜증을 냈다가 알고 보니 내가 피곤했을 뿐이었던 날도 있었죠. “내가 괜히 엉뚱한데 화내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때마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이런 말이 들려오는 듯합니다. <Barking up the wrong tree>는 이런 상황을 딱 맞게 표현해요. “잘못된 나무에 짖고 있다.”라는 의미를 가진 이 표현은 잘못된 대상에게 책임을 돌리거나, 문제의 원인을 엉뚱한 곳에서 찾는 상황에서 자주 쓰인답니다. - <the wrong tree> 잘못된 나무 <barking up> ~에 짖고 있다 이 표현은 19세기 초 미국의 사냥 문화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개를 데리고 다람쥐나 너구리 같은 동물을 숲에서 사냥했어요. 사냥개는 냄새와 소리를 따라 동물을 쫓았고, 위협을 느낀 동물이 잽싸게 나무 위로 도망치면, 사냥개는 나무 아래에서 짖으며 사냥꾼에게 그 위치를 알려줬습니다. 그런데 가끔 사냥개가 동물
시간의 주인, 식탁 철학 "인간은 시간을 지배할 때 미치도록 행복해진다. 시간을 지배하는 방법은 몰입이다. 미치도록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면 행복한 순간을 경험한 것이다. “ 고명환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무엇에 몰입을 경험하는가? 하루 24시간, 1,440분이라는 시간의 틀 속에 우리는 산다. 선물 같은 하루를 평등하게 받았지만, 혹시 시간에 끌려다니거나 타인의 생활 리듬에 맞춰 움직이지는 않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이 미래이고 곧 인생이다. 제한된 시간 속에서 과연 지금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이런 질문을 나는 한다. 특히 여인네들의 삼시 세끼 식사 준비를 통하여 과연 나는 내 시간의 주체로 살고 있는가이다. 시간이 ‘금’이라는 말, 곧 시간은 ‘나’다. 이는 존재의 본질이고, 당연시해야 할 것임에도 나는 없었다. 가족의 건강과 행복한 밥상이 엄마 사랑의 근간이 되고, 아내라는 존재감인데도 불구하고 나를 힘들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내 시간을 조율해야만 했다. 결국 ‘식사 시간’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를 우리 같이 고민해 보면 좋겠다. 시간의 주인으로 사는 것, 내가 하는 일에 몰입할 수 있는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식사 준비할 때 그
별사탕보다 더 달콤한 아빠의 기억 인생이 아름다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구별에 모여 사는 50억 사람들 이야기가 모두 다르기 때문은 아닐까요? 저는 하나하나의 생이 제각기 다르기에 특별하면서도 함께 할 수 있는 감성은 비슷하기에 아름다운 것이리라 생각해 봅니다. 그 많은 사람 모두가 똑같은 삶을 산다면 인생, 정말 재미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는 인류의 역사가 수천 년이 더 흘러도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 마음을 나누고 싶을 만큼 좋은 친구가 생긴다면, 꼭 묻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혹시, 마음속에 ‘꽁꽁’ 숨겨 둔 소중한 물건이 있니?” “나는 별사탕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예쁜 추억이 있지” 나의 어릴 적 기억 속에는 예쁜 별사탕이 있습니다. 너무나 소중해서 마음 깊은 곳에 꼭꼭 숨겨 둔 ‘별사탕 추억’은 그다지 특별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제가 다섯 살 무렵, 아빠는 마을 지구대로 방위를 다니셨습니다. 아침마다 아빠는 출근하면서 내 볼에 ‘뽀뽀’를 해 주셨고, 퇴근하시면 손에 건빵 한 봉지를 쥐어주셨습니다. 엄마와 나는 저수지 뚝방 끝까지 군복을 입은 아빠를 따라가서 손을 흔들었습니다. 아빠의 하루는 길었던 것 같아요
말의 결, 사람의 품 말은 언제나 사람을 드러낸다. 어투보다 의도가 먼저 느껴지는 순간이 있고, 단어보다 결이 먼저 다가오는 말들이 있다. 그 결은 종종 그 사람의 마음을 닮는다. 최근 들어, 말을 듣는 일이 부쩍 피로해졌다. 의미 없는 말이 너무 많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무심한 척 흘려지는 말, 정확히 무엇을 겨냥했는지 애매한 말, 감정은 담기지 않은 듯하면서도 묘하게 찔리는 말들이 자꾸 마음에 남는다. “그런 스타일은 요즘 잘 안 쓰지 않나?”, “그거 예전에 누가 했다가 잘 안 됐다고 들었어요.” “요즘은 좀 더 세련된 쪽이 좋지 않나 싶네요.” 말은 직접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 안엔 분명한 뉘앙스가 깃들어 있다. 누구를 향한 말인지 굳이 지목하지 않아도, 그 말이 방 안의 누군가를 불편하게 한다는 건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순간, 듣는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거리를 둔다. 말을 내뱉은 사람보다, 그 말의 결이 먼저 멀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때때로 단어보다 결에 반응한다. 같은 말을 들어도 어떤 이는 부드럽게 들리고, 어떤 이는 어딘가 날이 서 있다고 느껴진다. “괜찮아요”, “고생하셨어요”, “그럴 수도 있죠.” 이 짧은 말들조차도, 어떤 마음에서 나왔
공감 -마음 치유- 아픈 마음을 견디기만 해서 용량초과로 탈이 나는 것을 보면, 마음의 공간에도 용량이 있는 것 같습니다. 흩날리는 벚꽃 잎 사이로 걷는 산책길, 시원한 카페라테를 마시며 언니와 과거의 시간에 머물러봅니다. "언니야, 나는 어릴 적을 떠올리면 너무 어리숙했던 것 같아! 깨어있지 못해서, 미숙한 판단으로 아쉬운 일들이 많아. 제일 아쉬운 일은, 나의 감정을 들여다보지 않고 내버려 둔 일 같아!” 마음이 다치면 숨어 있던 감정부터 시동이 걸리지요. 그때, 부정적인 감정들은 크기가 커지고, 힘이 점점 더 세져서, 좋은 감정들이 빛을 보지 못하도록 부정적인 역할을 완벽하게 해냅니다. 그 감정이 부정적인 생각과 만나 현란한 춤을 추기 시작하면, 우리의 마음에도 병이 나는 것 같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상처, 귀에 들리지 않는 아픔으로 채워지는 우리의 내면. "감정이 아픈 것을 근육통이라고 한다면, 생각이 아픈 것은 뼈가 아픈 것과 같다." - 윤홍균의 마음 지구력 본문 중에서 - “동생아, 난 삶의 작은 파동에도, 지난 일들의 감정이 솟아오르는 것 같아! 억누르고, 참기만 한 감정은 내 마음속, 너무 깊게 숨어 있어서 찾을 수가 없어. 숨어 있는 감
두려움이 날개짓할 때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두려움과 마주한다. 두려움은 실패의 가능성과 상실, 관계에서의 상처, 낯선 환경 등 불확실한 미래에 대해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고 움츠러들게 한다. 사실 두려움은 결코 우리가 피해야 할 감정만이 아니다. 이는 본능적으로 생존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반응으로 가장 원초적인 힘인데 말이다. 이 두려움을 극복하며 한 걸음씩 나아가게 할 수 있는 힘은 무엇일까? 생존을 위한 본능, 말 그대로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삶의 용기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삶을 대하는 태도 즉 자세가 필요하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그들의 인생을 책임지고 키우려 노력한다. 사랑과 신앙으로 보듬으며 최선을 다하지만, 그들을 바르게 키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녀 양육에 온힘을 다해 애써도 아이가 어떤 길을 걸어갈지는 알 수 없다. 그럴 때면 ‘신앙은 불확실성 속에서의 도약’이라 케고르가 말했듯이, 도약의 발판인 신앙의 힘이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하지만 든든한 믿음이 흔들거리기도 한다 네 살 된 아들과 손을 잡고 들판을 유유히 걷고 있었다. 아이가 어릴 적이다. 아이의 가느다란 손목을 번쩍 들어 올리면 껑충 건너뛸 수 있
그리운 진달래꽃 올해는 유난히도 봄이 늦은 듯하다. 훌쩍 다가온 4월에도 눈이 내리니 말이다. 갈 때가 한참 지났는데도 미련이 남은 듯한 겨울 총각은 자꾸 되돌아왔다 가기를 몇 차례인지 모르겠다. 한술 더 떠, 수줍은 봄 처녀는 서둘러 자리 잡지 않고 왜 이리도 기다리는 사람 애를 태우는지, 차가운 봄바람에 덜덜 떠는 새싹들이 안쓰럽기만 하다. 나 역시 겨울 외투를 옷장에 넣고 빼는 일을 반복하다 어느새 3월을 다 보낸 것 같다. 봄소식은 누가 뭐래도 푸릇한 새싹들과 울긋불긋한 꽃송이들이 제일 먼저 전해준다. 살랑살랑 부드러운 바람은 풀냄새, 흙냄새, 꽃향기를 싣고, 온 동네를 가득 메운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이상 기온 때문인지 봄소식을 전하는 순서들이 뒤죽박죽인 것 같다. 그리 크지 않은 우리나라지만 지역마다 다른 일조량 때문에 꽃피는 시기가 조금씩 차이 난다고 한다. 정확한 순서를 정하기는 어렵지만, 가장 먼저 피는 건 매화꽃이라고 한다. 다음은 산수유, 목련, 개나리, 진달래, 벚꽃이다. 해마다 요맘때면 기다려지는 꽃이 있다. 바로 진달래다. 진달래는 먹을 수 있고 약에도 쓸 수 있다. 주로 산이나 들의 양지바른 따듯한 곳에서 높이는 2m~3m 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