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작은 준비성의 큰 힘- 무언가 결정할 때 망설여지는 시간이 있습니다. 왜 망설이고 있는지를 곰곰이 바라보면 ‘하기 싫다’는 솔직한 마음과 체력이 고갈될 때 ‘그냥 나중에 하면 되지 뭐’라고 미루고 싶은 나약함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은 과거의 힘들었던 경험들이 쌓여 만들어진 감정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어제는 시아버지 제사가 있었습니다. 사실 피곤하기는 했지만, 평소보다 기분 좋고 음식도 더 맛있게 느껴졌습니다. 시어머니에게 “어머니의 사랑이 많이 들어가서 더 맛있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라며 다정한 말도 건네 봅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남편과 아이를 뒷좌석에 태우고 핸들을 잡았습니다. 겨울밤의 찬 공기 때문인지 도로는 평소보다 한산했습니다. 빨리 집에 도착해서 쉬고 싶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떠있었습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녹색 신호에서 황색 신호로 바뀌어 정지하는 순간 ‘꽝’ 소리와 함께 차가 긁히고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택시가 뒤에서 들이받은 것이었습니다. 돌아보니 뒷좌석에서 아이가 앞뒤로 흔들리면서 “엄마, 무서워”라며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운전 경험이 부족한 저는 이런 상황을 처음 겪다 보니 머릿속이 하얘졌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우리는 왜 이렇게 쉽게 서로에게 피곤해질까 요즘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사람이 싫어진 건 아닌데, 관계가 피곤하다.” 예전보다 인간관계를 멀리하게 됐다는 고백도 흔하다. 그렇다고 외로움을 모르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사람을 원하면서도, 사람으로 인해 쉽게 지친다. 이 피로는 특정한 누군가 때문이라기보다, 관계를 유지하는 방식 자체가 달라진 데서 비롯된다. 과거의 관계는 단순했다. 연락은 드물었고, 만남은 약속이 있을 때만 이루어졌다. 감정은 얼굴을 마주한 자리에서 교환됐다. 지금은 다르다. 관계는 상시 접속 상태에 놓여 있다. 메시지는 즉각적인 반응을 요구하고, 읽음 표시는 침묵조차 의미를 갖게 만든다. 답장을 미루는 일은 개인의 사정이 아니라 태도로 해석된다. 관계는 더 촘촘해졌지만, 그만큼 관리해야 할 요소도 늘어났다. 문제는 사람이 아니라 ‘관계의 운영 방식’이다. 우리는 이제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 답장을 적절한 타이밍에 보내야 하고, 감정에 맞는 리액션을 선택해야 하며, 상대의 말에 충분히 공감하고 있다는 신호를 표현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기본값처럼 작동한다. 관계는 자연스럽게
노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요즘 자꾸 다리에 힘이 없어….” “걷는 게 힘드세요?” “산에 못 가 ...” “정형외과 진료 보실래요?” “가서 검사했는데...이상 없대...” “신경외과 가 보시겠어요?” “OOO 의사 진료 봤잖아. 괜찮대...” “혈관 외과 예약해 드릴까요?” “거기도 괜찮다고만 해...” 혈액 투석을 마친 할아버지는 당장 집에 가실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간호사실 앞에서 담당 간호사를 붙들고 계속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계시니까요. 할아버지 귀가 어두운 탓에 서로 큰 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습니다. 주변에서 눈치를 주자, 담당 간호사가 할아버지를 모시고 밖으로 나갑니다. 그는 당뇨로 인한 ‘말기 신장질환’으로 1주일에 3번, 4시간씩 혈액 투석을 받는 분입니다. 몇 달 전부터 계속 비슷한 불편함을 하소연하셨고 다양한 과에서 진료를 봤습니다. 여러 가지 검사를 하고 약까지 처방 받았지만 증상이 쉽게 나아지지 않아 조바심이 난 듯합니다. 질병이 아니라 노화로 인해 그럴 수 있다고 말씀드렸지만, 그 말은 듣지 못하셨나 봅니다. 하지만 요즘 할아버지의 행동을 보면 또 그렇지도 않다는 마음이 들어요. 어쩌면 못 들은 것이 아니라,
어른이 된다는 건, 더 이상 설명받지 못하는 상태에 들어가는 일이다 어릴 때 삶에는 설명이 있었다.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이 시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음 단계로 가려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누군가는 알려주었다. 잘하면 칭찬이 있었고, 못하면 이유가 있었다. 선택에는 대개 정답이 있었고, 그 정답은 비교적 분명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인생은 아직 이해 가능한 구조 안에 있었다. 그러나 어른이 되는 순간부터 삶은 설명을 멈춘다.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아무도 정확히 말해주지 않는 질문들 앞에 서게 된다. 이 일이 나에게 맞는지, 지금 버티는 게 현명한 선택인지, 떠나는 것이 용기인지 도피인지, 이 관계를 유지하는 게 성숙한 건지 미련한 건지. 누구도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대신 결과만 돌아온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부분 개인의 책임이 된다. 어른의 피로는 여기서 시작된다. 일이 많아서가 아니다. 시간이 없어서도 아니다. 진짜 피로는 ‘계속 결정해야 하는 상태’에서 온다. 무엇을 선택해도 정답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없는 채로, 다음 결정을 또 내려야 하는 삶. 어른이 된다는 건 단순히 책임이 늘어나는 일이 아니라, 설명 없는 선택을 반복해야 하는 상태에 들
삶의 기습공격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밤 9시가 조금 넘은 시간, 공부하는 사람들로 조용한 스터디 카페에 갑자기 우당탕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모두의 시선이 쏠린 방향에 한 학생이 넘어져 있습니다. 곧 멋쩍게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나겠지? 하는 생각으로 보고 있는데 미동도 없습니다. 관리자가 일으켜주려 다가가 말을 걸며 어깨에 손을 얹어봅니다. 그러나 아무 기척이 없고 몸은 축 처져있습니다. 목소리를 높이고 강하게 가슴을 두드려 보지만 어떤 반응도 없습니다. 곧 달려온 119를 타고 응급실로 향한 사람은 겨우 스물일곱 대학원생입니다. 이런저런 검사 후 나온 병명은 뇌경색이었습니다. 곧 중환자실로 옮겨지고, 치료를 시작하며 의식이 조금씩 돌아옵니다. 시간이 흐르자 약간은 어눌하고 흐릿한 목소리로 말합니다. “살려 주세요….” 그 말에 담긴 불안과 공포가 고스란히 느껴져 마음이 저릿해 옵니다. 며칠이 지나, 그는 조금씩 말이 또렷해지고 눈빛도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좌측 마비는 쉬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가 원망하듯 말합니다. “그때 죽을 걸 그랬나 봐요….” 20대의 젊은이가 말하는 죽음은 어떤 의미일까요? 어쩌면 삶을 초기화해, 오류 없이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시작
공감 –삶의 태도- 아침에 눈을 떴는데 왼쪽 뺨이 따가웠습니다. 일어나서 거울을 보니 손톱에 깊게 긁힌 것처럼 몇군데 파인 자국이 있었습니다. 어제 엎드려 잔 것이 문제였습니다. 주변에서는 말합니다. “어떻게 잔 거야, 밤새 무의식적으로 손톱으로 긁은 거 아냐?” 자면서 일어난 일이라, 아무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얼굴에 상처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 나의 모습을 CCTV가 있었다면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확인할 길이 없으니 밤새 엎드려 자던 모습을 짐작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삶에도 증거자료는 없지만 증명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어릴 적 경험이지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은 일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졸업 후 방학 중이었을 때, 한 친구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를 받자마자 내게 빌려 간 옷을 돌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친구와 통화한 적도 없었고 옷을 빌리지도, 만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의 다그치는 말이 너무 당황스러워 횡설수설하고 있을 때, 옆에 계시던 엄마가 직접 통화를 해보겠다며 바꿔 달라고 했습니다. 엄마는 차분하게 친구에게 말을 이어가셨습니다. “옷을 빌려주기 전 유미랑 통화했니? 옷을 빌려줄 때
왜 우리는 자꾸 미래를 묻고 싶어질까 새해가 밝고, 시간은 또 한 계절을 넘는다. 학교도, 부서도, 관계도, 다시 시작된다. 그럴 때 사람들은 어김없이 묻는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어떤 사람은 타로카드를 뒤집고, 어떤 사람은 사주팔자를 들여다보며, 어떤 사람은 밤늦게 AI 챗봇에게 묻는다. 이직을 해도 괜찮을지, 고백을 하면 받아줄지, 올해는 돈이 들어올지. 그렇게 우리는 자꾸 미래를 묻고 싶어진다. 타로든 사주든, 결국 그것은 ‘예측’의 기술이 아니라 ‘위로’의 형식에 가깝다. 무엇을 물었느냐보다, 왜 그걸 물어야 했느냐가 더 중요하다. 대개 우리는 확신이 없을 때 묻는다. 지금 이 선택이 맞는지,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누군가 “괜찮다”고 말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사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다. 다만 그 결정을 내릴 용기와 책임이 버거워서, 외부의 목소리를 빌리는 것이다. 내 안의 불안을 타인의 언어로 정리하고 싶은 것이다. 묻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다만, 자꾸만 묻게 되는 그 마음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묻는다”는 건 결국, 현재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마음을 뺏기고,
글쓰기로 저를 찾아갑니다 집안 이곳저곳에 쌓여가는 책을 보며, 저만의 도서관이 따로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막연한 그 마음은 확장되어 언젠가부터 누구라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작은 책방을 하고 싶어졌습니다. 함께 모여 책을 읽고, 필사도 하며, 글도 써보는 동네 사랑방이 되는 행복한 상상과 함께요. 책방의 주제는 ‘삶과 죽음’이면 어떨까 싶기도 했어요. 제가 관심있는 분야거든요. 이왕이면 작가가 하는 책방이면 더 근사할 것 같았습니다. 회원 모집도 어렵지 않고, 함께 글을 쓸 수 있는 자격도 될 테니까요. 이렇게 글의 시작을 여는 이유는 바로 저를 다독이기 위함입니다. 사실 작년 5월부터 글쓰기 개인 코칭을 받기 시작했는데요. 새해가 되며 글쓰기를 시작할 때의 마음, 그 초심을 되새기고 싶어서입니다. 아직 슬럼프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왠지 신년이라 더 힘내고 싶은 제 마음의 목소리가 들려서일듯합니다. 심사숙고 후, 글쓰기를 시작할 때는 그냥 써 보고 싶었고, 책도 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혼자 힘으로는 막막하고 힘들어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했던 개인 코칭, 웃고 우는 여러 사연도 있었지만, 지금 제가 느끼는 글쓰기의 의미는 시작과 많이
공감 –알아차림- 명상 수련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두워진 하늘에서 눈이 펑펑 내립니다. 뺨으로 스쳐 지나가는 눈바람이 시원하면서도 차갑게 느껴집니다. 어둠 사이로 가로등 불빛에 비치는 눈, 잠시 멈춰서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흩어지듯 한곳으로 날리는 눈을 보면서 우리의 삶이 떠올랐습니다. 유명한 곳이라면 한곳으로 밀집되는 사람들,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환경 속에서 ‘행복’을 찾아 헤매는 듯 느껴졌습니다. 휘날리는 눈바람을 맞으며 집을 향해 다시 걸었습니다. 하얀 눈송이가 검은 외투에 소복이 쌓이니 문득 옛날 생각이 났습니다. 어릴 적 가족들과 둘러앉아 웃고 떠들며 밥을 먹던 모습, 눈 오는 날이면 너무 신이 나서 눈길을 뛰어다녔던 모습, 방 청소를 마치고 엄마에게 칭찬받았던 일, 큰 실수를 저질렀어도 다독임과 격려받았던 그 시절. 어른이 되고 보니 옛 시절의 순수하고 행복했던 모습이 참 소중한 추억으로 느껴집니다. 집에 도착해서 딸아이에게도 말을 걸어봅니다. “언제 가장 행복했니?” “학교 안 가던 코로나 때요. 그리고 노는 시간이 많은 유치원 때요.” 중학교 입학을 앞둔 딸아이도, 이제는 늘어나는 수업 시간, 친구들의 폭풍 성장으로 달리지는
새로운 사람 앞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수많은 관계들이 동시에 시작된다. 새 학기를 맞이한 학생들, 새 학년에 올라간 아이들, 새로운 부서로 발령받은 직장인들, 처음 만나는 프로젝트 팀, 취미를 함께할 모임, 혹은 아직 이름도 익숙하지 않은 단톡방. 우리는 새로운 사람들 사이에서, 익숙했던 나의 태도를 다시 점검하게 된다. 그 앞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 어떻게 말해야 하고, 어디까지 보여줘야 하고, 얼마나 거리를 둬야 할까. 이상하게도 ‘처음’이라는 단어는 설렘과 동시에 불안을 동반한다. 괜히 어색해지고, 말수가 줄고, 본래보다 조심스러운 사람이 된다. 새로운 관계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스스로를 조정하려 애쓴다. 그 조정은 때때로 진짜 나를 감추는 방향으로 흐르기도 한다. 밝고 친절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 애쓰다가도, 돌아와선 진이 빠진다. 어색함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유머를 섞지만, 그 웃음 뒤로는 어색한 긴장이 남는다. 관계가 시작되는 그 찰나, 우리는 ‘보여주기’와 ‘숨기기’ 사이 어딘가에서 늘 스스로를 관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중 가장 자주 빠지는 착각은, ‘좋은 사람처럼 보여야 관계가 잘 풀릴 것’이라는 믿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