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도시의 조건, 이주 사회의 윤리
도시계획은 원래 배제의 기술이었다. 그것은 단지 길을 내고, 구획을 나누고, 주택을 배치하는 기술이 아니었다. 도시계획은 질문이었다. "누구를 이 안에 포함시킬 것인가?" 그리고 언제나 침묵하는 답이 있었다. "누구를 이 바깥에 놓아둘 것인가?" 1989년 봄, 내 기억 속의 도시계획은 무너져가는 벽이 아니라 사람을 밀어내는 스피커였다. "위험하니 빨리 철거하십시오." 그 이후 수십 년, 우리의 도시계획은 발전했고, 보다 복잡해졌으며, 보다 민주적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본질은 남았다. 도시는 여전히 누구를 중심으로, 누구를 주변으로 둘지를 계획한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늘 '이주자'가 있다. 우리는 이주민을 '거주자'라 부르지 않는다. '체류자', '외국인', '단기취업자'라 부른다. 그리고 그 명칭은 곧 그의 공간을 결정한다. 이주민은 본능적으로 '중심'이 아닌 '주변'으로 밀려난다. 농촌 외곽의 공장 인근, 임대료가 가장 낮은 반지하 골목, 하천변 불법 컨테이너 주거지, 산업단지 후문 인근의 폐가 개조 건물. 이것이 우리가 "그들에게 제공한 도시계획"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 우리는 그들에게 계획이라는 것을 한 번도 제공한 적이 없다. 우리는 그들을 도시의 요소로 포함한 적이 없다. 우리는 단지 그들이 머물지 않을 곳을 정했을 뿐이다. 이것이 우리가 마주한 '정주라는 이름의 비계획'이다. 삶은 있었고, 아이들이 뛰어놀았으며, 설거지 소리가 있었고, 명절에는 김치냄새도 피어났다. 그러나 계획서에는 그들이 없었다. 나는 이것을 '존재하되 불법인 삶'이라 부른다. 그리고 도시계획은 그 불법성을 '무시'라는 이름으로 보존해왔다. 이제 여기에서 광역비자가 등장한다. 광역비자는, 법무부의 한 문서가 아니라 도시계획 사상 가장 급진적인 개입 요청이다. 왜냐하면 이 제도는 말한다. "이주민이 어디에서 살고 싶은지를 묻고, 그 선택을 제도화하자." 그건 단지 이주정책이 아니라, 도시 설계권의 재편성이다. 광역비자는 지방에게 말한다. "너희는 그 사람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리고 도시에게 묻는다. "너는 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 말은 이렇게 번역된다. "너는 정주할 수 있는 공간인가?" 이제 광역비자를 받은 사람은 도시계획의 수혜자가 아니라, 도시계획의 요구자가 된다. 그는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여기서 살고 싶습니다. 그러니 집이 필요하고, 아이들을 위한 어린이집이 필요하고, 걸어서 갈 수 있는 병원이 필요하고, 내 언어를 이해하는 통역창구가 필요합니다." 그는 이 요구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지방정부는 이 요구를 받아들일 권한과 책임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 이것이 정주계획이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 도시계획의 새로운 장을 연다. 나는 제안한다. 우리는 지금 '이민도시계획'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어야 한다. 그것은 주거단지 몇 채를 더 짓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자격이 공간 속에 부여되는 새로운 윤리체계다. 다섯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첫째, 정주권을 '공간'으로 환원하지 말 것. 이주민에게 집을 제공하는 것은 시작일 뿐이다. 공간은 구조물로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살아도 된다는 사회적 승인'으로 제공되어야 한다. 즉, 공간은 허가가 아니라 환대의 형식이어야 한다. 둘째, 관계 기반 주거지 선정. 단순히 공가(空家)를 채워넣는 방식이 아니다. 그 지역에 먼저 정착한 이주민, 환대의 경험이 있는 마을, 사회적 연결망이 작동한 사례를 지표화해야 한다. 계획은 관계의 패턴을 따라야 한다. 셋째, 공유지로서의 마을 단위 복원. 마을회관, 어린이 놀이터, 경로당... 이 모든 것이 이주민과 지역민의 공유지가 되어야 한다. 마을이 공동의 자산이 되는 순간, 경계는 사라지고 환대는 살아난다. 넷째, 통합 커먼즈 구조 설계. 다문화지원센터는 이제 구조를 바꿔야 한다. 그곳은 행정대행소가 아니라 지역민과 이주민이 공동 운영하는 커뮤니티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 이주민이 제공하는 교육, 지역민이 제공하는 언어교실, 아이들의 공동 돌봄. 이 커먼즈야말로 새로운 공간 민주주의의 실험실이다. 다섯째, 도시 내 '지역적 환대의 존' 배치. 특정 구역에 집중적으로 환대 시스템을 배치하자. 그곳은 '이주민 전용지구'가 아니라 '공동체 전환의 선도구역'이 되어야 한다. 인구가 줄고, 빈집이 늘어난 동네가 미래형 정주도시의 테스트베드가 될 수 있다. 바로 그것이 이민도시계획의 핵심이다. 정주도시는 단지 사람이 머무는 곳이 아니다. 정주도시는 사람을 존중하기 위해 공간이 어떻게 변할 수 있는가를 증명하는 곳이다.
그 도시는 다음의 7가지 요소가 통합된 곳이어야 한다. 첫째, 주거. 안정적, 접근 가능, 지속 가능할 것. 둘째, 교육. 언어 장벽을 넘어, 공동의 미래를 꿈꾸게 할 것. 셋째, 의료. 기본권으로서의 건강이 보장될 것. 넷째, 교통. 통합과 연결의 구조를 가질 것. 다섯째, 상징. 자신이 이 도시의 일부라는 상징적 언어를 경험할 것. 여섯째, 기억. 이주민의 서사가 도시의 기억에 포함될 것. 일곱째, 정치. 주민참여의 문턱이 국적과 비자를 넘을 것. 나는 이 도시를 '계획된 환대'의 도시라 부르고 싶다. 그리고 대한민국 도시계획이 처음으로 '배제의 기술'을 내려놓고 '초청의 건축술'을 배우는 순간이 지금이다.
나는 말한다. 우리는 지금 도시계획이 아니라 '사람을 계획'해야 한다. 그 사람이 이 도시에 있을 수 있는 이유, 그 이유가 문서로만이 아니라 공간으로 존재할 때, 비로소 도시가 정주를 말할 수 있다. 광역비자는 정책이 아니다. 광역비자는 도시의 가장 윤리적인 선언이다. 그리고 이 선언은 지방이 시작해야 한다.
류형철 (Ryu, Hyung-Cheal)
-
도시·지역계획학 박사
-
경북연구원 공간환경연구실장 / 선임연구위원
-
공간계획, 지역사회 설계, 인구정책 및 이주 거버넌스 전문가
-
다양한 지자체·국가 정책과제 수행 경험과 현장 기반의 분석을 토대로, 공간과 사회, 제도와 주민 사이의 관계를 질문하는 글쓰기를 이어오고 있음.
rhc5419@gmail.com | 010-3309-5419
[대한민국경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