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삶의 태도- 아침에 눈을 떴는데 왼쪽 뺨이 따가웠습니다. 일어나서 거울을 보니 손톱에 깊게 긁힌 것처럼 몇군데 파인 자국이 있었습니다. 어제 엎드려 잔 것이 문제였습니다. 주변에서는 말합니다. “어떻게 잔 거야, 밤새 무의식적으로 손톱으로 긁은 거 아냐?” 자면서 일어난 일이라, 아무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얼굴에 상처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 나의 모습을 CCTV가 있었다면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확인할 길이 없으니 밤새 엎드려 자던 모습을 짐작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삶에도 증거자료는 없지만 증명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어릴 적 경험이지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은 일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졸업 후 방학 중이었을 때, 한 친구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를 받자마자 내게 빌려 간 옷을 돌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친구와 통화한 적도 없었고 옷을 빌리지도, 만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친구의 다그치는 말이 너무 당황스러워 횡설수설하고 있을 때, 옆에 계시던 엄마가 직접 통화를 해보겠다며 바꿔 달라고 했습니다. 엄마는 차분하게 친구에게 말을 이어가셨습니다. “옷을 빌려주기 전 유미랑 통화했니? 옷을 빌려줄 때
왜 우리는 자꾸 미래를 묻고 싶어질까 새해가 밝고, 시간은 또 한 계절을 넘는다. 학교도, 부서도, 관계도, 다시 시작된다. 그럴 때 사람들은 어김없이 묻는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요?” 어떤 사람은 타로카드를 뒤집고, 어떤 사람은 사주팔자를 들여다보며, 어떤 사람은 밤늦게 AI 챗봇에게 묻는다. 이직을 해도 괜찮을지, 고백을 하면 받아줄지, 올해는 돈이 들어올지. 그렇게 우리는 자꾸 미래를 묻고 싶어진다. 타로든 사주든, 결국 그것은 ‘예측’의 기술이 아니라 ‘위로’의 형식에 가깝다. 무엇을 물었느냐보다, 왜 그걸 물어야 했느냐가 더 중요하다. 대개 우리는 확신이 없을 때 묻는다. 지금 이 선택이 맞는지, 내가 잘하고 있는 건지, 누군가 “괜찮다”고 말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사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다. 다만 그 결정을 내릴 용기와 책임이 버거워서, 외부의 목소리를 빌리는 것이다. 내 안의 불안을 타인의 언어로 정리하고 싶은 것이다. 묻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다만, 자꾸만 묻게 되는 그 마음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묻는다”는 건 결국, 현재에 집중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마음을 뺏기고,
글쓰기로 저를 찾아갑니다 집안 이곳저곳에 쌓여가는 책을 보며, 저만의 도서관이 따로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막연한 그 마음은 확장되어 언젠가부터 누구라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작은 책방을 하고 싶어졌습니다. 함께 모여 책을 읽고, 필사도 하며, 글도 써보는 동네 사랑방이 되는 행복한 상상과 함께요. 책방의 주제는 ‘삶과 죽음’이면 어떨까 싶기도 했어요. 제가 관심있는 분야거든요. 이왕이면 작가가 하는 책방이면 더 근사할 것 같았습니다. 회원 모집도 어렵지 않고, 함께 글을 쓸 수 있는 자격도 될 테니까요. 이렇게 글의 시작을 여는 이유는 바로 저를 다독이기 위함입니다. 사실 작년 5월부터 글쓰기 개인 코칭을 받기 시작했는데요. 새해가 되며 글쓰기를 시작할 때의 마음, 그 초심을 되새기고 싶어서입니다. 아직 슬럼프까지는 아니라 할지라도, 왠지 신년이라 더 힘내고 싶은 제 마음의 목소리가 들려서일듯합니다. 심사숙고 후, 글쓰기를 시작할 때는 그냥 써 보고 싶었고, 책도 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혼자 힘으로는 막막하고 힘들어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했던 개인 코칭, 웃고 우는 여러 사연도 있었지만, 지금 제가 느끼는 글쓰기의 의미는 시작과 많이
공감 –알아차림- 명상 수련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두워진 하늘에서 눈이 펑펑 내립니다. 뺨으로 스쳐 지나가는 눈바람이 시원하면서도 차갑게 느껴집니다. 어둠 사이로 가로등 불빛에 비치는 눈, 잠시 멈춰서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흩어지듯 한곳으로 날리는 눈을 보면서 우리의 삶이 떠올랐습니다. 유명한 곳이라면 한곳으로 밀집되는 사람들,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환경 속에서 ‘행복’을 찾아 헤매는 듯 느껴졌습니다. 휘날리는 눈바람을 맞으며 집을 향해 다시 걸었습니다. 하얀 눈송이가 검은 외투에 소복이 쌓이니 문득 옛날 생각이 났습니다. 어릴 적 가족들과 둘러앉아 웃고 떠들며 밥을 먹던 모습, 눈 오는 날이면 너무 신이 나서 눈길을 뛰어다녔던 모습, 방 청소를 마치고 엄마에게 칭찬받았던 일, 큰 실수를 저질렀어도 다독임과 격려받았던 그 시절. 어른이 되고 보니 옛 시절의 순수하고 행복했던 모습이 참 소중한 추억으로 느껴집니다. 집에 도착해서 딸아이에게도 말을 걸어봅니다. “언제 가장 행복했니?” “학교 안 가던 코로나 때요. 그리고 노는 시간이 많은 유치원 때요.” 중학교 입학을 앞둔 딸아이도, 이제는 늘어나는 수업 시간, 친구들의 폭풍 성장으로 달리지는
새로운 사람 앞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수많은 관계들이 동시에 시작된다. 새 학기를 맞이한 학생들, 새 학년에 올라간 아이들, 새로운 부서로 발령받은 직장인들, 처음 만나는 프로젝트 팀, 취미를 함께할 모임, 혹은 아직 이름도 익숙하지 않은 단톡방. 우리는 새로운 사람들 사이에서, 익숙했던 나의 태도를 다시 점검하게 된다. 그 앞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 어떻게 말해야 하고, 어디까지 보여줘야 하고, 얼마나 거리를 둬야 할까. 이상하게도 ‘처음’이라는 단어는 설렘과 동시에 불안을 동반한다. 괜히 어색해지고, 말수가 줄고, 본래보다 조심스러운 사람이 된다. 새로운 관계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스스로를 조정하려 애쓴다. 그 조정은 때때로 진짜 나를 감추는 방향으로 흐르기도 한다. 밝고 친절한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 애쓰다가도, 돌아와선 진이 빠진다. 어색함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유머를 섞지만, 그 웃음 뒤로는 어색한 긴장이 남는다. 관계가 시작되는 그 찰나, 우리는 ‘보여주기’와 ‘숨기기’ 사이 어딘가에서 늘 스스로를 관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중 가장 자주 빠지는 착각은, ‘좋은 사람처럼 보여야 관계가 잘 풀릴 것’이라는 믿음이
<죽음의 책>을 소개합니다. 죽음을 묘사하는 말들이 참 많습니다. 눈을 감다, 돌아가시다, 먼 길을 떠나다, 세상을 등지다, 마지막 여행을 떠나다. 별이 되다, 한 줌 흙이 되다, 운명하다, 별세하다, 작고하다, 졸하다, 소천하다, 타계하다, 황천길을 가다, 천국에 가다, 열반에 들다, 요단강을 건너다, 삼도천을 건너다, 승천하다, 귀천하다, 입적하다, 숨이 다하다, 고인이 되다, 영면하다, 유명을 달리하다. 등등 이보다 훨씬 다양한 표현들이 있는데 이 문장들이 포함된 글에서는 상실감이나 그리움이 자주 묻어납니다. 그러나 뉴스로 전해지는 죽음과 관련한 문장들은 두려움과 공포로 다가올 때가 있지요. 어떤 죽음이든 그 색을 우리 마음대로 정할 수는 없겠지만, 죽음이란 명제는 우리를 늘 겸허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죽음을 일상으로 가까이 가져올 수 있는 책 한 권을 소개하려 합니다. 바로 <죽음의 책>이라는 그림책입니다. 이 작품이 번역되어 나올 때 펀딩에 참여했던 터라 저에게는 더욱 각별한 책입니다. 독일 작가인 ‘Katharina von der Gathen 카타리나 폰 데어 가텐’이 아동을 위해 쓴 철학서입니다. 이 책은 죽음과
계획이 틀어져야 인생이 시작된다 살다 보면 늘 그렇다. 계획대로 되는 일은 드물다. 일찍부터 세운 유학 계획이 막판 변수 하나에 무너지고, 승진은 코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돌아가며, 오래 준비한 시험은 예상치 못한 컨디션 난조로 실패한다. 오랜 시간 공들인 관계는 사소한 오해로 멀어지고, 가족처럼 지낸 이와도 이유 없이 어긋난다. 모든 것을 잘 관리했다고 생각했지만, 인생은 계획이라는 직선을 빗겨가며 자신의 곡선을 그려간다. 그 곡선 앞에서 우리는 묻는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어디서부터 틀어진 걸까?” 그러나 조금 멀리서 보면 알게 된다. 계획이 어긋나는 건 실패가 아니라, 새로운 장이 열리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것을. 모든 것이 계획대로만 흘러가는 인생은 편안할 수는 있지만 생생하지는 않다. 설계된 시나리오대로만 흘러가는 삶은 오히려 현실보다 시뮬레이션에 가깝다. 살아 있다는 건 예측을 뛰어넘는 변수와 마주하는 일이다. 그 예측 불가능함 속에서 진짜 내 마음이 드러난다. 계획이 무너질 때 우리는 처음으로 주변을 돌아보고, 내 안에 남은 가능성과 감정을 다시 만지작거리게 된다. 준비한 길이 끊어질 때, 우리는 뒤늦게 물어본다. “이게 정말 내가 가고 싶었던
부고 소식은 삶의 과속방지턱 같습니다 한창 바쁜 시간인 오전 9시 17분, 책상 위 놓인 핸드폰에 진동이 옵니다. 알림창에 떴다가 사라지는 메시지를 보니 부고 문자입니다. 조문하기 위해 장례식장을 확인하고, 함께 갈 수 있는 지인을 물색합니다. 직장 인트라넷에는 또 다른 부고를 알리는 팝업창이 떠 있습니다. 이상하지요? 계절이 바뀔 때 세상을 떠나시는 분들이 많은데 특히 겨울철이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유명한 배우분들의 슬픈 사연이 전해졌습니다. TV나 영화로만 만나던 분들이지만 어린 시절부터 오래도록 봐 오던 분들이라 그들에게 내적 친밀감이 있었나 봅니다. 마치 가까운 지인의 사망 소식처럼 마음이 울적하고 쓸쓸했습니다. 좀 더 기다리다 꽃피는 계절에 떠나도 좋을 텐데, 뭐가 그리 급해서 추운 계절에 떠났는지 안타까운 마음에 하늘을 바라봅니다. 세상에 알려진 이들의 부고 소식이 전해질 때면, 뉴스에서는 그들의 치열했던 삶과 이룬 업적들을 짧은 영상으로 만들어 보여줍니다. 텔레비전에 비치지 않는 보통 사람의 경우 비록 그런 추모 영상은 없지만, 유명인 못지않게 삶에 성실하고 최선을 다하며 살았을 겁니다. 저의 부모님이 그랬고, 제 이웃이 그랬던 것처럼
새해의 태도는 조용하게 결정된다 새해를 맞이하는 마음이란 늘 묘하다. 달력 한 장만 넘겼을 뿐인데도, 왠지 인생의 방향 전체가 바뀔 수 있을 것만 같고, 과거의 실수도 새하얀 리셋 버튼을 누른 듯 무효화되기를 바라는 기대가 스며든다. 그러나 삶이란 그렇게 간단하게 초기화되는 것이 아니다. 결심은 때때로 좋지만, 태도는 단순한 다짐으로 바뀌지 않고, 현실과의 마찰 속에서만 조금씩 조정된다. 그래서 새해는 거창한 목표보다 조용한 태도를 다시 정비하는 시간이어야 한다. 변화는 선언이 아니라 지속이다. 누군가는 ‘처음부터 다시’라는 말에서 위안을 얻고, 누군가는 ‘이번엔 잘해보자’는 주문을 반복한다. 하지만 사람은 해가 바뀌었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의욕은 새로워도 습관은 끈질기고, 기대는 커졌지만 일상의 관성은 어제 그대로다. 그래서 더 필요한 건 ‘의지’보다 ‘이해’다. 내가 왜 늘 같은 지점에서 주저앉는지, 무엇을 놓치면 불안해하는지, 어떤 종류의 강박에 길들어 살아왔는지를 바라보는 일. 새로운 한 해는 자꾸 무언가를 더하려 애쓰기보다는, ‘덜어내도 괜찮다’는 자기 수용의 태도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올해는 진짜 잘 살아야 해.” 많은 이들이 새해 앞에서 하는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가? 얼마 전 독서 모임에서 책 한 권을 선물 받았습니다. <데일리 필로소피 Q&A>라는 제목의 책입니다. 이 책은 365개의 질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매일 1가지씩 묻고 있으며 그 아래에는 독자의 생각을 적을 수 있는 약간의 공란을 두고 있었습니다. 책은 ‘JAN 1일, 2일, 3일…’ 일자별로 구성되어 있어, 마치 1월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잖아요? 그래서 올해의 마지막 주이자 새해가 시작하는 주의 첫날부터 질문에 대한 짧은 답변을 기록해가고 있습니다. 며칠 후 해가 바뀐 1월 1일에는 다섯 번째 물음이 저에게 주어졌습니다. 공교롭게도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가?’라고 묻고 있더군요. ‘공교롭다’라고 표현한 이유는 한 해를 시작하는 날에 꼭 필요한 질문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마치 “오늘부터 시작하는 새해에 어떻게 살고 싶니?”라고 저에게 묻고 있는 것 같았거든요. 머릿속에 온갖 긍정적인 단어와 표현들이 떠다녔습니다. 하지만 결국 ‘잘 살고 싶어요!’라는 짧은 답을 썼습니다. 그러자 제 마음이 다시 질문합니다. ‘잘 사는 게 뭘까요?’라고…. 아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