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감 –머무르기'와 '빠져들기'의 차이 마음 치유를 위해 여행을 떠나 본 적 있으신가요? 여행길에서 마주하는 풍경은 마음을 편안하게 합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자연은 나에게 충고와 비판하지 않습니다. 그저 “안녕” “왔어” “잘 가”라고 반기며 인사를 하는 듯합니다. 명상을 공부할 때 일입니다. “마주하기 힘든 감정이 있을 때, 그 감정에 충분히 머무르고 빠져야만 벗어날 수 있는 것 같아요.”라고 나는 말했습니다. 명상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유미 선생님, 불편한 감정을 마주했을 때, 알아차린 후 머물러 보세요. 그리고 다양한 감정들이 있다면 그대로 느껴봐요.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 보는 거지요. 충분히 머무는 것과 그 감정에 깊게 빠져드는 것은 다릅니다.”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저는 불편한 감정을 마주할 때마다 그 안으로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느끼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슬픔 그 자체가 되고, 불안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에 갇혀버렸습니다. 감정에 빠져드는 것이 감정을 제대로 느끼는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머무르기'와 '빠져들기'의 차이. 그 미묘한 경계를 이해하는 순간, 비로소 제 안의 오래된 패턴
 
								당신이 내년 여름까지만 살 수 있다면 지금부터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당신이 내년 여름까지만 살 수 있다면 지금부터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코로나 시국에 처음 만들어진 ‘그믐’이라는 온라인 독서모임 공간이 있습니다. 저는 이 모임을 초창기에 가입했습니다. 비대면 독서모임에 대한 관심이기도 했지만 좋아하는 작가의 홍보에 혹한 측면이 더 큽니다. 한 달간 1권 읽는 모임에 참여했었지만, 이런저런 핑계로 한 번의 경험으로 끝났습니다. 그저 메일로 발송되는 그믐의 소식지를 훑어보며 ‘요즘 이런 책들과 함께하고 있구나, 나도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내년에는 직접 모임을 만들어 볼까?’라는 생각만 하던 중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강연에 그믐 대표가 출연했습니다. 그저 글로만 아는 분이지만 내적 친밀감으로 인해 반가웠어요. 하지만 동영상 썸네일의 제목은 저에게는 충격적이었습니다. ‘뇌종양 판정받고 내년 여름까지만 살 수 있다면 뭘 하시겠습니까?’ 그분이 진단받은 ‘교모 세포종’은 예후가 좋지 않은 뇌종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병으로 인해 그녀는 마치 40배속의 삶을 사는 것 같다고 합니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질문하고, 이에 대한
 
								지적은 왜 늘 못되게 들릴까 “그걸 그렇게 하면 안 되지.”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그런 걸 왜 몰라?” 지적은 언제나 옳은 말처럼 보인다. 말의 겉모습은 정당하고 논리적이며, 때로는 배움의 기회처럼 포장된다. 하지만 들은 사람은 이상하게 기분이 상한다. 맞는 말이었음에도 억울하고, 괜히 위축되고, 관계의 온도가 뚝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도대체 왜일까. 지적은 왜 이렇게 늘 못되게 들릴까. 우선 지적이라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작동한다. 지적을 하는 사람은 사실상 옳음의 위치, 더 많이 아는 위치, 더 정확한 시선의 위치에 서 있다. 그 자체가 이미 위계다. 나는 알고 너는 모르기 때문에, 나는 말하고 너는 들어야 한다는 구조. 이 말은, 그 내용이 아무리 정확하다 해도, 이미 관계 안에서는 감정적 상하를 만들어낸다. 지적이 못되게 들리는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 말은 나를 향하고 있지만, 나를 배려하진 않는다. 지적이 통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감정이 삭제된 채 도착한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은 ‘나는 그냥 사실을 말했을 뿐’이라며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한다. 하지만 언어는 감정 없는 방식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지적은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