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나를 안아주고 싶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조용하던 공간에 갑작스레 ‘쾅’ 하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린 사람들이 목격한 건 부서진 의자와, 그 옆에 넘어져 있는 한 여성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이었고, 곧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말 없이 카페를 빠르게 나섰다. 커피잔은 아직 반 이상 남아 있었지만, 그녀의 뒷모습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사라졌다. 그 자리는 창가 쪽이라 햇살이 잘 들었지만, 의자가 유난히 약해 보이는 탓에 많은 이들이 앉으려다 말곤 했다. 하필 거기에 앉은 그녀가 특별히 무리한 움직임을 한 것도 아니었기에, 그 상황은 오롯이 ‘운이 나빴다’는 말로밖에 설명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무너진 의자보다 자기 자신이 먼저 무너진 듯한 얼굴로 그 공간을 빠르게 벗어났다. 자신이 망가뜨렸다는 죄책감, 그리고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먼저 찾아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픔의 신호를 받아들이기도 전에, 부끄러움이 감각을 덮었다. 우리는 그런 순간을 안다. 넘어지고, 흘리고, 부서질 때, 가장 먼저 상처받는 건 자존감이다. 작은 사고일 뿐인데, 그 상황이 나라는 사람 자체를 정의하려는 듯 느껴지는 순간.
당신만의 애도방법은 무엇인가요? 해돋이를 보러 강릉 바닷가에 왔습니다. 모래사장 위에 놓인 데크에 앉아 해가 떠오르기를 기다립니다. 붉은 기운이 번지는 수평선에는 두툼한 구름 띠가 펼쳐져 있네요. 바다 위로 솟아오르는 해가 아니라 구름 위로 돋는 해를 보게 될 거 같습니다. 어두운 바닷물은 하나의 몸처럼 덩어리져 넘실거리고, 쉼 없이 파도는 밀려오고 있습니다. 저와 마주하고 있는 바다 자체가 마치 거대한 생물처럼 느껴집니다. 아침 해는 어느덧 구름의 가장자리를 따라 빛으로 선을 그리며 그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일출을 기대하는 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약속을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믿음이 있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 옛날 사람들에게 태양은 신이 되었나 봅니다. 절대 신뢰를 저버리지 않으니까요. 궂은 날씨, 비록 해가 보이지 않는 날에도 늘 거기 있다는 것을 아니까요. 구름 위로 점점 빛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제 눈이 시려서 해를 마주할 수 없습니다. 내 몸에 와 닿는 붉은 기운과 열기에 가만히 집중해봅니다. 고개를 숙이고 바다 위에서 일렁거리는 해그림자만 눈으로 쫓습니다. 그것조차도 눈이 부시네요. 바다 위에서 굼실거리며 만들어지는 이랑마다 해
공감 –동기유발 당신이 두려워하는 일을 매일 하나씩 하라. 엘리너 루즈벨트 고등학교 1학년 때, 선생님께서 성적표를 나눠주실 때마다 담임 확인란에 항상 같은 말씀을 적어주셨습니다. 바로 '동기유발'이었습니다. 동기유발의 사전적 의미는 특별한 원인이나 계기로 인해 어떤 일을 행동하게 되거나, 그러한 마음을 먹게 되는 내적 과정이라고 합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동기유발'이라는 말은 몸과 마음이 지칠 때 더욱 선명하게 머릿속에서 맴돕니다. 고등학교 때 공부가 어려운 나에게는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학교에서 머무는 일은 큰 부담이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졸업은 해야지. 대학 가야지‘라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견뎌냈습니다. 그것은 어른이 되어서도 힘든 일이 있으면 ‘그냥 버티자’라는 마음으로 살아 온 듯합니다. 그렇지만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욕구들을 억누르고, 호르몬 변화로 인한 심리적 갈등을 마주해야 하는 일들 앞에서 '버티기'는 때로 회피가 되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런 순간 떠오르는 것이 바로 '동기유발'입니다. 오래 묵은 패턴의 아집과 되돌아가려는 미숙한 습관.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며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나에게,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하며 만나봅니다.
당신이 내년 여름까지만 살 수 있다면 지금부터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당신이 내년 여름까지만 살 수 있다면 지금부터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코로나 시국에 처음 만들어진 ‘그믐’이라는 온라인 독서모임 공간이 있습니다. 저는 이 모임을 초창기에 가입했습니다. 비대면 독서모임에 대한 관심이기도 했지만 좋아하는 작가의 홍보에 혹한 측면이 더 큽니다. 한 달간 1권 읽는 모임에 참여했었지만, 이런저런 핑계로 한 번의 경험으로 끝났습니다. 그저 메일로 발송되는 그믐의 소식지를 훑어보며 ‘요즘 이런 책들과 함께하고 있구나, 나도 다시 시작해야 하는데, 내년에는 직접 모임을 만들어 볼까?’라는 생각만 하던 중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강연에 그믐 대표가 출연했습니다. 그저 글로만 아는 분이지만 내적 친밀감으로 인해 반가웠어요. 하지만 동영상 썸네일의 제목은 저에게는 충격적이었습니다. ‘뇌종양 판정받고 내년 여름까지만 살 수 있다면 뭘 하시겠습니까?’ 그분이 진단받은 ‘교모 세포종’은 예후가 좋지 않은 뇌종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병으로 인해 그녀는 마치 40배속의 삶을 사는 것 같다고 합니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질문하고, 이에 대한
공감 –머무르기'와 '빠져들기'의 차이 마음 치유를 위해 여행을 떠나 본 적 있으신가요? 여행길에서 마주하는 풍경은 마음을 편안하게 합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자연은 나에게 충고와 비판하지 않습니다. 그저 “안녕” “왔어” “잘 가”라고 반기며 인사를 하는 듯합니다. 명상을 공부할 때 일입니다. “마주하기 힘든 감정이 있을 때, 그 감정에 충분히 머무르고 빠져야만 벗어날 수 있는 것 같아요.”라고 나는 말했습니다. 명상 선생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유미 선생님, 불편한 감정을 마주했을 때, 알아차린 후 머물러 보세요. 그리고 다양한 감정들이 있다면 그대로 느껴봐요. 감정의 흐름을 따라가 보는 거지요. 충분히 머무는 것과 그 감정에 깊게 빠져드는 것은 다릅니다.”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저는 불편한 감정을 마주할 때마다 그 안으로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느끼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슬픔 그 자체가 되고, 불안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에 갇혀버렸습니다. 감정에 빠져드는 것이 감정을 제대로 느끼는 것이라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머무르기'와 '빠져들기'의 차이. 그 미묘한 경계를 이해하는 순간, 비로소 제 안의 오래된 패턴
지적은 왜 늘 못되게 들릴까 “그걸 그렇게 하면 안 되지.”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그런 걸 왜 몰라?” 지적은 언제나 옳은 말처럼 보인다. 말의 겉모습은 정당하고 논리적이며, 때로는 배움의 기회처럼 포장된다. 하지만 들은 사람은 이상하게 기분이 상한다. 맞는 말이었음에도 억울하고, 괜히 위축되고, 관계의 온도가 뚝 떨어지는 것을 느낀다. 도대체 왜일까. 지적은 왜 이렇게 늘 못되게 들릴까. 우선 지적이라는 행위는 본질적으로 ‘위에서 아래로’ 작동한다. 지적을 하는 사람은 사실상 옳음의 위치, 더 많이 아는 위치, 더 정확한 시선의 위치에 서 있다. 그 자체가 이미 위계다. 나는 알고 너는 모르기 때문에, 나는 말하고 너는 들어야 한다는 구조. 이 말은, 그 내용이 아무리 정확하다 해도, 이미 관계 안에서는 감정적 상하를 만들어낸다. 지적이 못되게 들리는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 말은 나를 향하고 있지만, 나를 배려하진 않는다. 지적이 통하지 않는 또 다른 이유는, 감정이 삭제된 채 도착한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은 ‘나는 그냥 사실을 말했을 뿐’이라며 자신의 입장을 합리화한다. 하지만 언어는 감정 없는 방식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지적은 사
당신의 계절이 궁금합니다 유난히 비가 많이 내리는 가을입니다. 미처 물들지 못했던 가로수 잎이 빗물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빠르게 떨어지는 기온만큼이나 가을은 급하게 떠나는 것 같습니다.늘 맞이하는 계절, 가을이지만 높고 푸 른 하늘과 알록달록한 단풍이 특히나 귀하게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흔히 사람의 삶을 계절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1년마다 맞이하는 사계절이 있고, 생애 전체를 아우르는 사계절도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가능성과 기회로 꿈틀거리는 봄, 집중과 성장의 왕성한 기운이 가득한 여름, 뿌린 대로 거두는 수확에 대해 성찰하는 가을, 지난 시간의 아쉬움과 다음 계절을 준비함에 설레는 겨울처럼요. 저 역시 이 글을 쓰면서 삶의 계절을 느껴봅니다. 늦었다고 생각하며 미루기만 했던 글쓰기, 하지만 제게 다가온 인연이란 계절을 맞이하며, 그간 잊고 있었던 제 마음속 행복의 씨앗을 뿌릴 수 있었습니다. 계절의 시간을 지나면 저도 수확할 날이 오겠지요. 삶의 계절, 나이와 상관없이 어떤 마음으로 살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사계절은 다르지 않을까 조용히 생각해봅니다. 최근에 한 여배우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연기도 잘하고 예쁜, 요즘 한창 뜨는 배우입니다
공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불안하면 마음이 미래를 향해 있고, 우울하다면 과거에 머물러 있다고 합니다. 마음이 아파서 우는 사람에게 “무슨 일 있으세요?”라고 물으면, 과거의 기억들이 현재까지 그를 힘들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예전의 좋았던 시절을 놓지 못해 달라진 환경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도 우울감은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을 보면 ‘저 사람 왜 저렇게 신이 났지’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무엇을 할 때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자신을 사랑하며 돌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어릴 적에 그런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은 환경이 좋아서 그럴 거야. 돈이 많아서 하고 싶은 거 다 하며 살 거야. 사랑 많이 받고 자랐을 거야.’라며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감이 넘치고 주어진 환경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겉모습은 마음의 그림자일 뿐, 실상을 보려면 눈을 감아야 할 때도 있다." -랄프 왈도 에머슨-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오래 전 한 헬스 트레이너 말이 떠오릅니다. “선생님 너무 멋지세요.”라며 인사했더니 “저는 겉만 번지르르한 빛 좋은
감정은 판단의 적인가, 조력자인가 사람은 늘 선택의 연속 속에 산다. 오늘 점심 메뉴부터, 내년 진로, 오랫동안 함께할 사람까지. 그런데 이상하게도, 중요한 결정일수록 ‘감정’이 개입된다. 누구나 알고 있다. 흥분하거나 초조할 때 내린 결정은 대부분 후회로 이어진다는 것을. 그럼에도 우리는 반복한다. 왜 그럴까. 이 질문은 감정과 판단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탐구하게 만든다. 최근 심리학에서는 이 문제를 단순히 “감정은 이성의 방해물”이라고 규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감정이 판단에 어떻게,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를 정량적으로 측정하고, 이 감정이 충동성으로 이어질 때의 위험성에 주목한다. 임상심리학자 매튜 V. 엘리엇(Matthew V. Elliott)과 연구진은 2022년, 감정 기반 충동성과 위험한 의사결정 간의 메타 분석을 발표했다. 90편 이상의 연구를 종합한 이 논문에 따르면, 감정에 의해 촉발되는 충동성(Emotion-Related Impulsivity)은 위험한 판단과 유의미한 양의 상관관계를 가진다. 격한 감정이 순간적인 결정을 불러오고, 그 판단은 실패 가능성을 높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지점은 ‘감정 중심 판단의 습관화’다. 예일대학교
[대한민국경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