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영의 마음공감

불필요한 친절을 버리는 연습


좋은 사람이라는 말은 언제부턴가 피로한 말이 되었다. 다정하고 친절하고 배려심이 많다는 칭찬은 분명 듣기 좋은 말이지만, 이상하게도 삶을 무겁게 만드는 말이기도 하다. 사람들 앞에서 한결같이 미소를 유지하고, 타인의 말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조심스럽게 말끝을 다듬는 사람. 그런 사람은 종종 남의 감정에 과하게 책임을 지고, 자기 감정은 뒤로 미룬다. 그래서 ‘좋은 사람’일수록 더 자주 지친다. 친절은 관계를 부드럽게 만들지만, 그 친절이 자기 소모로 유지될 때, 그건 더 이상 미덕이 아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착하게 행동하는 법을 배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예의 바르게 말하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라는 말은 교육의 기본처럼 여겨진다. 문제는 그 배움이 늘 ‘타인을 중심에 둔 태도’로 귀결된다는 데 있다. 정작 자신을 어떻게 배려해야 하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타인을 향해 기꺼이 마음을 내어주면서도, 정작 자기 마음은 방치한다. 그렇게 자란 착한 어른들은 어느 날 문득, 자기 감정의 언어를 잃어버린 채, 무조건적인 수용의 자세에만 익숙해져 있음을 깨닫는다.

 

불편한 자리를 애써 부드럽게 만드는 사람. 거절하고 싶지만 그저 웃으며 넘기는 사람. 분명 상처받았는데도 “괜찮다”고 먼저 말하는 사람. 이들은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태도가 갈등을 줄이고 관계를 부드럽게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런 ‘좋은 태도’는 점점 자기를 투명하게 만들고, 결국에는 자기 자신도 자기 감정을 지나쳐 버리는 상태에 이른다. 친절이 더 이상 따뜻한 관계를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감정을 대신 짊어지는 역할이 된다면 그것은 다정함이 아니라 자기 착취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적당한 거리란 결국, 어디까지 타인의 감정에 참여하고, 어디서부터는 물러설 것인지를 결정하는 선이다. 하지만 착한 사람은 그 선을 넘는 데 익숙하다. 어쩌면 자기가 그 선을 넘어도 아무도 불편해하지 않을 거라 믿기 때문에, 혹은 누군가는 그것을 당연히 여기기 때문에. 그렇게 친절은 점점 더 과해지고, 어느 순간엔 수단이 아니라 정체성이 되어버린다. 나는 그런 사람이어야 한다고 믿는 순간, 그 믿음은 자기 감정에 대한 검열이 되기도 한다. “이런 말 해도 되나?”, “이건 너무 예민한가?”라는 질문이 무의식처럼 떠오른다면, 이미 스스로를 조율하고 있다는 뜻이다.

 

불필요한 친절을 버린다는 건, 냉정해지거나 이기적으로 굴겠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정말 중요한 사람에게 진심을 다해 다정하기 위해, 나를 먼저 챙기겠다는 뜻이다. 말의 온도를 무조건 낮추기보다는, 내 마음이 편한 쪽으로 말할 수 있는 연습이 필요하다. 누군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일도 결국 내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 가능한 법이다. 내가 이미 고갈된 상태에서 건네는 친절은 상대에게도 결국 억지스러운 배려가 된다. 그럴 땐 도리어 거리를 두는 것이 더 건강한 선택일 수 있다.

 

우리는 착한 사람으로 살기 위해 너무 많은 감정을 숨기며 살아왔다. 웃고 있지만 웃고 있지 않은 날들, ‘괜찮다’는 말 뒤에 괜찮지 않은 마음을 쌓아두던 시간들. 그런 날들이 이어지면 결국 어느 날엔 마음이 완전히 닫혀버린다. 친절을 주는 일에 익숙해져서, 누군가의 친절을 받는 것조차 어색해지는 사람. 하지만 어떤 관계든 주기만 하거나 받기만 하는 상태로 오래 유지될 수는 없다. 진짜 다정함은 타인에게만 건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기꺼이 건넬 수 있는 감정일 때 비로소 온전하다.

 

그래서 이제는 조금은 달라져도 괜찮다. 모든 상황에서 부드럽게 반응하지 않아도, 모두의 기대에 부합하지 않아도 괜찮다. 누군가에게 미안하지 않기 위해 나를 계속 깎아내는 방식으로 친절해지기보다, 때로는 선을 긋고, 때로는 말없이 자리를 벗어나며, 그렇게 조심스럽게 나를 돌보는 연습을 시작해야 한다. 다정함은 의무가 아니라 선택이다. 내가 원할 때, 내가 할 수 있을 만큼만, 그 마음을 건네도 된다는 것을 이제는 나 자신부터 믿어줘야 한다.

 

 


 

 

최보영 작가

경희대 경영대학원 예술경영학과 석사
UM Gallery 큐레이터 / LG전자 하이프라자 출점팀
 
[주요활동]
신문, 월간지 칼럼 기고 (매일경제, 월간생활체육)
미술관 및 아트페어 전시 큐레이팅

 

[수상경력]

2024 대한민국 眞心예술대상 

 

 

 

 

 

 

 

[대한민국경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