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비 내리는 늦은 밤의 추억
이른 아침부터 시원하게 쏟아지던 비가 그쳤다. 한나절을 넘어가는 정오, 집 근처 개천으로 산책하러 나간다. 연초록의 잎들이 어서 오라며 손짓하다 말고 돌아가라고 손사래를 친다. 장난꾸러기 바람의 변덕을 못 본 척,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러자 어느새 다가와 머리카락을 흔들고 얼굴과 귓불을 어루만진다. 따듯하고 부드러운 오월의 바람은, 제법 다정하고 살갑다. 달콤한 꽃향기와 풋풋한 풀냄새는 덤이다.
바람 따라 걷다 보니 시선은 어느덧 하늘 끝에 머무른다. 누가 가을하늘의 푸르름이 가장 짙다고 했을까? 반문하고 싶을 만큼 오월의 하늘도 그에 못지않게 짙은 푸르름인데 말이다.
이곳 개천 길은 나에게 소중한 추억 저장소이다. 사계절을 스무 번도 넘게 보내며 담아둔 대부분은 추억은 아이들과 함께했던 행복한 시간이 가장 많다. 가끔 혼자 걸으며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기도 했고, 보고 싶은 엄마와 통화하면서 그리움을 달래기도 했던 길. 또, 친구와 함께 수다를 떨며 동네가 떠나가도록 깔깔거리며 걷기도 했었다. 이별의 아픔을 맞이한 어느 밤에는 지나가는 사람들 아랑곳하지 않고 ‘엉엉’울며 걸었던 길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 몇 년 전, 어느 밤에 동갑 친구에게 갑자기 전화가 왔다. 그날 밤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5월이었다. 그는 취미로 사진을 찍는 친구였는데, 밤 11시쯤에 개천으로 나오라는 연락은 처음이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한걸음에 달려 나갔다. 그런데, 그 친구는 삼각대에 걸친 카메라를 들고 활짝 웃는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친구는 몹시 들떠있었고, 얼굴은 상기되어있었다.
“나 오늘 한가지 꿈을 이루었어.”
“그게 뭔데?”
“오늘 드디어 내가 꿈꾸던 사진을 찍었다니까?”
“아! 그래? 축하해”
“고마워. 기분 너무 좋다. 내가 떡볶이 살게”
우리는 근처 포장마차에 가서 따끈한 어묵탕과 떡볶이를 시켰다.
친구는 카메라에 저장된 사진을 보여 주며 연신 설명을 늘어놓았다. 비에 젖은 채로 오돌오돌 떨면서도 뭐가 그리 좋은지, 세상 가장 행복해 보였다. 난 그런 친구에게 살짝 짜증이 났다. 그 기쁜 마음은 충분히 알겠지만, 이렇게 늦은 시간에, 비도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난 그런 친구의 행동이 철부지 아이의 이기심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사진을 본 순간 하고 싶은 말을 떡볶이와 함께 잘근잘근 씹어서 꿀꺽 삼켜야만 했다.
친구의 사진은 훌륭했다. 사진 속에는 우산 없이 빗속을 걸어가는 중년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칠 흙같이 어두운 밤에 쏟아지는 빗속의 여인은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당당하게 빛나고 있었다. 여인의 먼발치에는 필요 없다는 듯, 내던져진 우산 하나가 쓸쓸하게 뒹굴고 있었다. 사진 속의 여인은 아름답다거나 멋지다는 느낌보다는 내게 이렇게 외치는 것 같았다.
“날 그냥 내버려 둬!”
“넌 도대체 뭐하는 거야? 네 꿈은 어디에 처박아 둔 거지?”
감히 따라 할 수 없을 만큼, 도발적인 여인의 질문은 나를 압도했다. 사진을 찍고 기뻐하며 그 늦은 시간에 나를 불러낸 친구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었다.
“그래! 내게도 꿈이 있었지.”
나는 한 대 맞은 듯, 충격을 받았다. 그 밤 온몸이 비에 젖는 줄도 모르고 찍은 사진을 자랑하며 기뻐하던 친구의 그 열정은 나를 부끄럽게 했고, 큰 깨달음을 선물했다.
나이 50을 지천명이라 하는 건, 하늘의 뜻을 알았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아직도 하늘의 뜻이 무엇인지를 다 깨닫지 못한 것 같다. 그만큼 바쁘게 살아왔기 때문인가 보다. 한 사람과 사랑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정성껏 키우며 그것이 삶의 전부인 줄 알고 살았다. 이젠 아이들도 다 컸고, 나름대로 독립했으니 그동안 미뤄 두었던 나의 숙제를 꺼내 보기로 했다.
오월의 바람은 그 밤, 친구에게 느꼈던 깨달음을 꿈틀거리게 했다. 마음속에 숨겨두었던 오래전의 꿈의 씨앗을 꺼내 먼지를 털었다. 밭을 바라보며 가을에 풍성한 수확을 꿈꾸는 농부의 마음처럼 씨뿌리고 가꾸면서 기다리는 내 마음도 바람처럼 일렁인다.
윤미라(라떼)
경희사이버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졸업
스토리문학 계간지 시 부문 등단
안산여성문학회 회원
시니어 극단 울림 대표
안산연극협회 이사
극단 유혹 회원
단원FM-그녀들의 주책쌀롱 VJ
2024 대한민국 眞心교육대상 수상
[대한민국경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