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여행에는 빈칸이 필요하다
여행을 앞두고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지도를 펼치는 것이다. 가보고 싶은 식당과 카페를 저장하고, 놓치면 아쉽다는 명소와 반드시 봐야 한다는 풍경을 표시한다. 짧은 일정 안에서 동선을 맞추다 보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획은 금세 촘촘해진다. 낯선 도시를 향한 설렘은 어느새 놓쳐서는 안 될 것들의 목록으로 바뀐다.
한때 여행의 어려움은 정보가 부족하다는 데 있었다. 어디에 가야 할지, 무엇을 먹어야 할지 몰라 현지에 도착한 뒤에야 지도를 구하고 사람들에게 길을 물었다. 지금은 그 반대다. 검색창을 열면 수많은 추천이 쏟아지고, 누군가의 여행 일정과 식당 목록을 그대로 내려받을 수도 있다. 정보가 많아질수록 선택은 쉬워질 것 같지만 실제로는 불안이 커진다. 내가 고른 곳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 것 같고, 어렵게 떠난 여행에서 한 끼라도 실패하면 손해를 본 듯한 기분이 든다.
그래서 우리는 여행에서도 실패하지 않으려 한다. 평점이 높은 식당을 고르고, 가장 아름답게 사진이 나온다는 시간에 맞춰 명소를 찾는다. 유명한 메뉴를 주문하고 사람들이 감탄했다는 자리에서 같은 풍경을 바라본다. 충분히 조사한 덕분에 큰 실패는 피할 수 있지만, 여행은 점차 낯선 도시를 만나는 일보다 이미 검증된 경험을 재현하는 일이 되어간다. 다른 사람이 찍은 사진 속 장소를 찾아가 같은 구도로 사진을 남기고 나면, 그곳에 다녀왔다는 증거는 생기지만 내가 무엇을 발견했는지는 쉽게 말하기 어렵다.
물론 계획은 필요하다. 시간과 비용을 들여 떠나는 여행에서 가고 싶었던 곳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은 당연하다. 예약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식당도 있고, 동선을 잘못 잡으면 하루를 길 위에서 보낼 수도 있다. 계획은 낯선 곳에서 헤매지 않도록 돕고, 여행을 기다리는 시간을 풍요롭게 한다. 문제는 계획을 세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계획 밖의 시간을 모두 낭비라고 생각하는 데 있다.
일정과 일정 사이에 빈틈이 없으면 우리는 도시를 바라볼 시간보다 다음 장소로 이동할 시간을 더 자주 확인하게 된다. 식사를 마치기 무섭게 다음 예약을 걱정하고, 마음에 드는 거리를 만나도 정해둔 일정을 지키기 위해 발길을 돌린다. 잘 짜인 계획을 모두 수행하고도 이상하게 피곤한 여행이 되는 이유다. 몸은 낯선 도시에 있지만 마음은 하루의 진도를 관리하고 있다.
반대로 오래 기억되는 장면들은 대개 계획 밖에서 생긴다. 갑자기 내린 비를 피해 들어간 가게, 길을 잘못 들어 발견한 골목, 다음 일정까지 시간이 남아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던 공원처럼 애초의 목록에는 없었던 순간들이다. 그 모든 우연이 언제나 근사한 것은 아니다. 우연히 들어간 식당이 실망스러울 수도 있고, 길을 헤매다 지치기도 한다. 그러나 예상과 달랐던 순간까지 포함될 때 여행은 다른 사람의 추천을 확인하는 시간이 아니라 비로소 나 자신의 경험이 된다.
우리는 평소에도 시간을 빈틈없이 사용하는 법을 배운다. 같은 시간에 더 많은 일을 해내고, 더 나은 선택을 하며, 후회할 가능성을 줄이려 한다. 그러다 여행에서도 효율을 추구한다. 먼 곳까지 왔으니 하나라도 더 보고 더 유명한 것을 먹어야 제대로 다녀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행의 가치는 얼마나 많은 장소를 섭렵했는가로 결정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낯선 도시의 오후를 바라본 한 시간이 유명한 명소 다섯 곳보다 더 깊은 기억을 남길 수도 있다.
빈칸은 준비가 부족해서 생긴 공백이 아니다. 그 도시가 나에게 말을 걸 수 있도록 남겨두는 자리다. 무엇을 볼지 정하지 않은 시간에는 눈앞의 풍경을 따라갈 수 있고, 어디에서 먹을지 정하지 않은 저녁에는 그날의 기분을 선택에 반영할 수 있다. 계획이 여행의 뼈대를 만든다면 빈칸은 그 안에 숨을 불어넣는다. 빈칸이 있어야 여행자는 일정의 수행자가 아니라 자신의 감각으로 길을 고르는 사람이 된다.
한 도시를 다 보고 돌아오는 여행은 없다. 며칠 동안 유명한 장소를 빠짐없이 다녔다고 해도 우리가 만난 것은 그 도시의 일부에 불과하다. 다 보지 못했다는 아쉬움을 실패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다. 못 가본 골목과 먹지 못한 음식, 다음으로 미뤄둔 풍경은 여행에서 빠뜨린 것이 아니라 그 도시와의 관계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증거다.
좋은 여행은 아무것도 놓치지 않은 여행이 아니다. 돌아온 뒤에도 마음속에 무엇인가 남아 있는 여행이다. 목록을 모두 지운 자리에는 끝냈다는 만족이 남지만, 비워둔 자리에는 다시 가고 싶다는 마음이 남는다. 여행을 완성하는 것은 촘촘한 계획이 아니다. 끝내 남겨둔 빈칸이다.

최보영 작가
경희대 경영대학원 예술경영학과 석사
UM Gallery 큐레이터 / LG전자 하이프라자 출점팀
[주요활동]
신문, 월간지 칼럼 기고 (매일경제, 월간생활체육)
미술관 및 아트페어 전시 큐레이팅
[수상경력]
2024 대한민국 眞心예술대상
[저서]
상처의 밀도 (2026) -에듀래더글로벌-
[대한민국경제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