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자기 삶을 포기하는 순간
사람은 언제 무기력해질까.
많은 사람들은 일이 너무 많아서라고 말한다. 너무 바쁘고, 너무 피곤하고, 너무 오래 버텼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삶을 오래 들여다볼수록 나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지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밤을 새우고, 아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고, 꼭 지켜야 할 일이 있으면 몸이 무너져도 끝까지 버틴다. 인간은 피로보다 의미를 오래 견디는 존재다.
그런데도 어느 날 갑자기 아무것도 하기 싫어진다. 해야 할 일은 그대로인데 몸이 움직이지 않고, 예전에는 즐거웠던 일도 귀찮아진다. 사람들은 그 상태를 무기력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는 무기력을 에너지가 부족한 상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기력은 사람이 자기 삶의 주인 자리에서 조금씩 내려온 상태다.
삶은 어느 날 갑자기 내 것이 아니게 되는 것이 아니다. 아주 천천히 바뀐다. 해야 하는 일이 하고 싶은 일보다 많아지고, 선택하는 시간보다 맞춰야 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누군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결정하고,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움직이고, 책임을 다하기 위해 하루를 채운다. 처음에는 그것도 내 선택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선택은 사라지고 역할만 남는다.
역할은 훌륭하게 수행했지만 정작 자기 삶은 살지 못하는 사람.
나는 무기력이 그런 사람에게 가장 자주 찾아온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무기력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로 이해한다. 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무기력한 사람은 너무 오래 무언가를 해온 사람이다. 참고, 버티고, 책임지고, 맞춰주고, 해내느라 자신을 가장 나중으로 미뤄온 사람이다. 그래서 무기력은 게으름의 결과가 아니라 성실함의 후유증일 때가 많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어느 순간 하나의 문장이 자리 잡는다.
‘내가 무엇을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이 문장은 단순한 체념이 아니다. 삶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아직 내일은 오지 않았는데 이미 내일을 알고 있다고 믿고,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이미 결말을 써버린다. 사람은 실패해서 멈추는 것이 아니다. 미래를 너무 빨리 단정하는 순간 멈춘다.
그래서 무기력은 현재의 감정이 아니다. 이미 끝났다고 믿는 미래가 현재를 지배하는 상태다.
심리학에서는 이런 믿음을 ‘자기효능감’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내가 하는 행동이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다. 흥미로운 것은 사람은 능력이 있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면 달라질 수 있다고 믿을 때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반대로 그 믿음이 사라지면 능력이 아니라 의욕부터 잃는다. 무기력은 몸이 멈춘 것이 아니라 가능성을 믿는 마음이 먼저 멈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회복의 순서를 자주 거꾸로 생각한다. 의욕이 생기면 다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의욕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삶이 다시 내 것이 되기 시작할 때, 의욕은 뒤늦게 따라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거창한 변화가 아니다. 여행을 떠나는 일도 아니고, 인생을 새로 계획하는 일도 아니다. 회복은 의외로 아주 작은 선택에서 시작된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내가 결정한 일 하나, 결과가 어떨지 몰라도 내가 해보기로 한 행동 하나. 그 작은 선택은 우리에게 잊고 있던 감각을 돌려준다.
‘아직도 나는 내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자기효능감은 거대한 성공으로 회복되지 않는다. 선택한 만큼 삶이 조금이라도 달라지는 경험이 반복될 때, 사람은 비로소 삶을 다시 믿기 시작한다.
우리는 무기력을 없애려고 애쓴다. 하지만 어떤 무기력은 없애야 하는 감정이 아니다. 너무 오래 역할만 살아온 삶이 보내는 가장 정직한 질문이다.
‘지금 당신은 누구의 삶을 살고 있는가.’
어쩌면 회복은 의욕을 찾는 일이 아니라 이 질문에 다시 대답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오늘 하루를 다시 내 선택으로 채우는 것.
비록 아주 작은 선택일지라도 그것이 내 의지에서 시작된 것이라면 삶은 조금씩 원래의 주인을 기억하기 시작한다.
사람은 지쳐서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삶을 선택할 수 없다고 느끼는 순간부터 삶을 포기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회복은 더 열심히 사는 데 있지 않다.
다시 선택하는 데 있다.
그리고 삶은 언제나 그 작은 선택 하나에서, 다시 시작된다.

최보영 작가
경희대 경영대학원 예술경영학과 석사
UM Gallery 큐레이터 / LG전자 하이프라자 출점팀
[주요활동]
신문, 월간지 칼럼 기고 (매일경제, 월간생활체육)
미술관 및 아트페어 전시 큐레이팅
[수상경력]
2024 대한민국 眞心예술대상
[저서]
상처의 밀도 (2026) -에듀래더글로벌-
[대한민국경제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