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비자는 문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약속이다
비자는 종이 한 장이다. 번호가 있고, 기한이 있고, 발급기관의 직인이 찍혀 있다. 그 종이를 본다. 그리고 사람을 본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 종이는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은 문장으로 만들고 있었다. 너무 많은 현장에서 비자 소지자를 '체류자'라 불렀다. 그는 이 땅에 거주하고 있었고, 일하고 있었고, 아이를 키우고 있었고, 세금을 내고 있었고, 지자체 행사에서 노래도 불렀다. 그런데 그는 여전히 '체류자'였다. 정말 이상하지 않은가? 그가 지역사회에 이렇게 많은 걸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그를 '임시 체류 중'으로 부른다. 그건 법률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이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이 순간을 비자의 존재론적 실패라고 부른다. 비자는 존재를 증명하지 못했다. 비자는 단지 존재의 조건을 통제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비자를 마치 신분증처럼 다룬다. 비자를 기준으로 사람의 자격을 재단한다. 그래서 F-1은 안 되고, F-2는 되고, F-4는 절반만 인정되고, E-9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을 태연히 한다.
우리는 지금 이 '체류자격'이 아니라 관계자격이라는 개념으로 비자 체계를 다시 써야 할 시점에 있다. 체류자격은 얼마나 오래 머물 수 있느냐를 따진다. 관계자격은 얼마나 깊이 얽혀 있느냐를 묻는다. 이제 광역비자는 그 '관계자격'을 제도화할 수 있는 대한민국 역사상 첫 번째 제도다. 왜냐하면, 광역비자는 정착지의 선택권을 이주민에게 주고, 그 선택을 존중할 수 있도록 지역과 국가가 함께 약속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사실상 지방공화국 대한민국이 이주민에게 주는 첫 번째 지역 시민권이다. 나는 제안한다. 이제 광역비자를 '정주권의 수단'이 아니라 관계권의 문서로 보자. 그리고 제도 안에 다음의 세 가지를 넣자. 첫째, 관계지표 기반의 정주 심사 모델 도입. 체류기간이 아니라, 지역활동·참여도·교류관계를 기준으로 비자 연장 여부를 판단한다. 이것은 이주민이 얼마나 오래 있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깊이 지역과 관계 맺고 있는가를 중요시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다. 관계의 질이 숫자보다 중요하다는 선언이다. 둘째, 공동체 인정권 부여. 지역 내 이주민의 정주자격을 주민이 참여한 심의 구조 속에서 함께 인정할 수 있도록 한다. 이는 단순한 행정절차가 아니라, 지역 공동체가 스스로 구성원을 선택하고 환영하는 의식이다. 이주민은 더 이상 관료의 판단 대상이 아니라, 이웃의 인정을 받는 존재가 된다. 셋째, 이주민-지역 관계서사 아카이빙 플랫폼 구축. 비자신청 시, 이주민의 지역 서사를 입력하게 하고 이를 정책결정의 정성지표로 활용한다. 이것은 숫자로 환원될 수 없는 삶의 이야기를 정책의 중심에 두는 혁신적 시도다. 서사는 통계보다 강력하다. 이야기는 숫자보다 오래 기억된다. 이 모든 제안의 핵심은 비자를 신분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신뢰 문제로 옮겨놓는 일이다. 그래야 비자는 살아 있는 문서가 된다. 살아 있는 문서란 언제든 누군가의 삶을 다시 읽을 수 있는 공동체의 약속서다. 지금 대한민국의 이주민 정책은 숫자와 자격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몇 명을 받을 것인가, 어떤 자격을 줄 것인가.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숫자도, 자격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관계다. 우리가 이주민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어떤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갈 것인가가 핵심이다.
나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 믿는다. 비자를 신청한 이주민이 지역주민 면접을 받는다. 그 자리에서 그는 말한다. "저는 이 마을에서 어르신 심부름도 하고, 마을 잔치 때 된장국도 끓였어요." 그리고 어떤 주민은 말한다. "맞아, 내가 먹어봤어." 그날, 비자는 승인된다. 이유는 단 하나. 함께 있었다는 증거. 이것은 단순한 행정절차의 변화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공동체를 이해하는 방식의 근본적 전환이다. 공동체는 경계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사람들의 네트워크다. 이주민은 그 네트워크에 새롭게 연결된 노드다. 그들은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이다.
새 정부가 출범하면, 이주민 정책은 어떻게 바뀔 것인가? 나는 바란다. 비자가 더 이상 허가증이 아니라 환영장이 되기를. 체류자격이 관계자격으로 전환되기를. 이주민이 더 이상 '관리 대상'이 아니라 '관계의 주체'로 인정받기를. 그러므로 나는 묻는다. "비자는 서류인가, 약속인가?" 그리고 이제 답하고 싶다. "비자는 관계를 정식으로 받아들이는, 공동체가 내미는 첫 번째 악수이다." 지방소멸 시대, 인구절벽의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사람이 아니라, 더 깊은 관계다.
단순히 숫자를 채우는 이민정책이 아니라, 의미 있는 관계를 만드는 정주정책이 필요하다. 비자는 그 첫걸음이다. 그것이 서류가 아니라 약속일 때, 우리는 진정한 정주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류형철 (Ryu, Hyung-Ch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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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지역계획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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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연구원 공간환경연구실장 /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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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계획, 지역사회 설계, 인구정책 및 이주 거버넌스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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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지자체·국가 정책과제 수행 경험과 현장 기반의 분석을 토대로, 공간과 사회, 제도와 주민 사이의 관계를 질문하는 글쓰기를 이어오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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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경제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