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형철의 인구정책 칼럼 - 이주와 공존, 정책과 삶의 경계를 묻다-

  • 등록 2025.06.20 21:5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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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행정은 주민을 몰랐고, 정책은 삶을 몰랐다


모든 것은 잘 짜인 기획서에서 시작됐다. 모든 게 명료했고, 표는 균형이 맞았으며, 법령 검토는 빠짐이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제도는 태어났다. 그 이름은 지역특화형 비자. 대한민국 이주정책 사상, 가장 과감하게 '지방의 선택'을 전제로 한 실험이었다. 그러나 제도는 언제나 책상 위에서 정결하게 시작되고, 삶은 언제나 그 책상 밖, 먼지와 땀 냄새 속에서 삐걱인다. 경북의 한 읍면에 비자가 도착했다. 정확히는, 한 이주민이 지역특화형 비자(F-4-R)를 들고 도착했다. 시청 공무원은 그 이름을 처음 들었다. "F-4-R요?" 그는 말했다. "여기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는 법무부의 훈령을 몰랐다. 법령엔 지역정착지원계획이 있었고, 중앙부처 협업체계가 명시되어 있었지만, 현장의 공무원은 아무도 그걸 교육받지 않았다. 이것이 한국식 제도 운용의 현실이다. 제도는 명확하다. 문서도 완벽하다. 그러나 그걸 시행할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제도적 유령의 시대'라 부르고 싶다. 비자는 있다. 하지만 제도는 없다. 정착지원팀은 없다. 지자체 매뉴얼도 없다. 사례관리자는 없고, 정주 상담사는 없다. 행정은 제도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진짜 제도는 그 제도를 믿는 사람의 눈빛, 그 제도를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의 목소리, 그 제도 속에서 기꺼이 살아주겠다는 의지로 이루어진다. 그 사람들 없이 제도는 텅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 정책은 삶을 다룬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되묻는다. 삶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겨울철 아이 감기를 걱정하는 밤, 갑자기 끊긴 가스 공급에 당황하는 오전, 근무표와 어린이집 운영시간이 안 맞아 괴로워하는 오후, 집 앞 상점 주인이 자신을 "고향 사람"이라고 부르는 어떤 저녁. 그런 순간들을 기획서에 쓸 수 있는가? 정책은 그 삶을 담고 있는가? 지역특화형 비자는 지금 이 질문 앞에 서 있다. 나는 제도가 성공하기 위해 다음의 세 가지 제도적 정렬이 필요하다고 본다. 첫째, 지자체 내부 체계와 중앙 매뉴얼의 일치. 지금은 법무부 훈령과 지자체 운영체계가 따로 논다. 매뉴얼은 있지만, 현실의 시간표와 부서조직과는 어긋나 있다. 법무부는 출입국 사무소를 통해 비자를 발급하지만, 지자체는 이것을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 모른다. 정부 부처 간의 소통 부재는 현장의 혼란으로 이어진다. 둘째, 지역 공무원의 감정 역량 강화. 다문화 교육이 아니라, '정주 철학'에 대한 공동체 감수성을 키워야 한다. 공무원들은 이주민을 행정 대상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이웃으로 인식하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하다. 정착은 단순한 행정 절차가 아니라 인간적 관계의 형성이기 때문이다. 셋째, 제도 설계자와 실행자의 상시 피드백 구조. 설계자는 현실을 모르고, 실행자는 제도를 이해 못 한다. 이 둘 사이의 공백을 메우는 상시 회의체가 필요하다. 서울의 법무부 사무실에서 만든 제도가 경북의 작은 마을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점은 무엇인지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개선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정책을 '프로젝트'로 보지 말고 '생태계'로 봐야 한다고 제안한다.

 

정책은 한번 쏘아올리는 화살이 아니라 끊임없이 조율되는 호흡이다. 일회성 사업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리와 조정이 필요한 살아있는 체계다. 이주민의 정착은 5년 단위 계획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세대를 넘어 진행되는 사회적 과정이다. 지난 가을, 안동의 한 마을에서 이주민 가족을 만났다. 그들은 이미 5년째 그 마을에 살고 있었다. 아이들은 한국어가 더 편했고, 부부는 마을 행사에 빠지지 않았다. 법적으로는 '외국인'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이미 그 마을의 주민이었다. 제도는 현실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날, 한 이주민은 말했다.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내 이름이 적힌 서류를 받았어요." 그는 고개를 들었고, 종이에 손을 얹었다. 행정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우리가 다시 물어야 할 것은 이것이다. "이 제도는, 한 사람의 이름을 말할 수 있는가?" 만약 없다면, 그 제도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이다.

 

새 정부는 이민정책을 재설계하면서 이 근본적인 간극을 메워야 한다. 행정과 삶, 제도와 현실, 중앙과 지방, 이론과 실천 사이의 간극을. 그것은 단순한 법령 개정이나 예산 증액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이주민을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 행정을 실행하는 방식의 변화, 그리고 공동체를 상상하는 새로운 방식을 요구한다. 정주는 단지 체류가 아니라 삶의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그 뿌리를 행정이 알아보지 못한다면, 어떤 비자도 진정한 정착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다.

 

 


 

 

류형철 (Ryu, Hyung-Cheal)

  • 도시·지역계획학 박사

  • 경북연구원 공간환경연구실장 / 선임연구위원

  • 공간계획, 지역사회 설계, 인구정책 및 이주 거버넌스 전문가

  • 다양한 지자체·국가 정책과제 수행 경험과 현장 기반의 분석을 토대로, 공간과 사회, 제도와 주민 사이의 관계를 질문하는 글쓰기를 이어오고 있음.
    rhc5419@gmail.com | 010-3309-5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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